[크리스마스에 소꿉놀이를] 배우가 싸준 김밥을 먹어본 적이 있는가?
제목 : 게릴라 극장 젊은 극작가 오세혁 기획전 : 크리스마스에 소꿉놀이를
<크리스마스에 30만원 만난 확률>, <아빠들의 소꿉놀이>
기간 : 2011/08/24 ~ 2011/09/04
장소 : 게릴라 극장
원작 : 오세혁
연출 : 오세혁 / 손정우
출연 : 류 성, 최현미, 강동호 / 송영학 주수정 이승기 황세원
기획 : 게릴라 극장, 연희단거리패
제작 : 정의로운 천하극단 걸판, 극단 유목민
주관 : 게릴라 극장, 서울문화재단
한 해에 한 작가의 두 작품이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2011년, 31세의 젊은 작가 오세혁은 서울신문과 부산일보의 신춘문예에 각각 “크리스마스에 30만원 만날 확률”, “아빠들의 소꿉놀이”로 당선을 하는 기염을 토하며 등단한다. (…) 게릴라 극장에서는 신춘문예당선작인 두 작품을 연작공연하면서 서울 관객들에게 오세혁 작가를 소개하려 한다. -작품 소개 중에서
<크리스마스에 30만원 만난 확률>을 희곡으로 읽었을 때 순발력이 일품이었다. 재미도 재미지만 사족 없이 죽 달려가는 대사가 참 좋았다. 단순하지만 끝까지 힘을 잃지 않고 달려가는 힘이 여타 신춘당선작들과 달랐다. 앞으로 장편극을 봐야겠지만 재기발랄함에다 현실에 대한 시대인식까지 고루 갖췄고, 주변을 배경으로 관객과 소통하기에도 좋은 글이다. 하지만 희곡에서 기대가 큰 탓인가, 작가가 직접 연출을 맡아 올린 연극은 희곡에서 보여준 장점이 잘 보이지 않았다. 무난하게 희곡을 연극으로 옮겨다고 할까. “2011년 밀양공연예술축제에서 자신이 쓰고 연출하며 출연한 <그와 그녀의 옷장>으로 대상과 연출상을 받았다”는 기사를 봤으나 연극 <크리스마스…>만 놓고 보면, 판단하기 쉽지 않지만, 그 정도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대화를 원칙으로 삼는 희곡이나, 글로 읽은 희곡과 연극이 차이가 난다는 건 신인 작가로 한계일 수도 있고, 연출로 농익기 전이라 그 속도감을 살리지 못한 탓도 있을 것이다. 올 3월 ‘2011 신춘단막전’(연출 오동식) 때와 달리 직접 연출을 맡았다는 점에서 다소 무난한 선택한 선택을 한 게 아닌가 싶다. 그가 속한 극단 걸판은 장소불문 어디든 달려가는 게릴라 같은 극단이다. 바쁜 속보를 생각하면 이 작품을 다듬기 보다 앞으로 행보가 더 기대되는 건 사실이다. 쓰고 출연하고 연출하고, 2005년부터 극단 생활을 해왔다고 프로필에 적고 있으나 어쩌면 이제 막 주목받는 신인으로 시작이라는 점에서 만만치 않은 연극 현실에서 좋은 힘을 받고 앞으로 전진하길 바란다.
<아빠들의 소꿉놀이>도 희곡으로 앞선 작품이 가진 장점을 고루 갖췄다. “알고 보니… 이렇더라”는 천연덕스러운 반전 구조를 처음부터 내놓고 가면서도 흥미를 잃지 않고 잘 끌어간다. <크리스마스…>에 비해 손정우 연출이 맡은 작품은 배우들 개성에 맞게 깔끔하게 풀어냈다. 해고된 지 1년이 넘은 프로 해고자 ‘대머리’ 역 이승기 배우나 ‘꾸부정’ 아내 단발 역 주수정 배우의 경우 선을 넘지 않는 수준에서 배우 스스로 가진 개성이 잘 드러났다. 유쾌한 작품이지만 앞선 작품과 마찬가지로 짧은 소품이라 딱히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 있었다. 알고 찾아간 게 아니었으나 생각지 않게 운이 좋았다. 그 시간을 통해 연극이 배우 예술이라는 말을 동의한다고 하면서도 무대 위 보이는 모습으로만 판단했던 게 아닌가 새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극단/연출/작가 순으로 먼저 고려해서 선택한다고 하나, 알게 모르게 연극에서도 알려진 배우 혹은 좋아하는 배우들만 집중을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연극에서는 관객 시선에서 모두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받아야 한다).
대부분 연기학원 학생들인 관객 질문은 작품에 대한 얘기보다 당장 배우로 첫 발을 내딛기 위한 과정에 관심이 많았다. 첫 데뷔작이 화려해 보인 이유지만 오세혁 작가의 얘기를 들어보면 걸어온 길이 그리 편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았다. 연극을 고집하는 한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연출, 작가, 배우들은 생각보다 객석에서 웃음이 터지지 않아 소통이 안 되나 싶어 고민스러웠다고 했는데, 거리를 두고 즐기기에는 관객 대부분이 반나마 배우들 입장이라 관점이 다른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객석에서 고민과 맞물려 배우를 하게 된 동기나 가장 힘든 점을 직설로 물어봐서 솔직하다고 해야할지, 순진하다고 해야할지, 작품과 상관없는 선후배 만남의 장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 질문에 쑥스럽게 대답하는 배우들 이야기는 무대 밖 삶으로 이어진 고민이 담겨 있어 되레 배우로 그들을 이해하는 시간이었다. 짤막한 소품 두 편에 나눠 등장한 배우들에게 사실 그리 주목이 가지 않았다.
오세혁이란 작가에게 주목이 쏠렸고, 또 한편으로 코미디 연기에 그다지 신뢰를 보내지 않는 이유도 있다. 물론 그들은 코미디 연기만 하는 배우들이 아니다. 연기를 막 시작했다는 동안 아들 역 강동호 배우, "연극 배우는 남의 시선으로만 판단할 수 있으니 자신의 연기를 어떻게 봐야할지 늘 고민"이라는 진지한 대답으로 학생들에게 생각할 여지를 던진 아버지 역 류 성 배우, 허둥대는 역할 와중에 내공이 엿보이는 송영학 배우, <비계덩어리>에서도 그렇지만 천연덕스러운 연기가 일품인 황세원 배우까지 관객들과 마주하기 충분히 숙련된 배우들이다.
배우 중에 <크리스마스...> 엄마 역 최현미 배우가 했던 얘기가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객석에서 방금 자신의 이름이 불려서, 참 좋고 당황해서 말이 잘 안 나왔다고 했다. 의외였다. 그녀를 연희단거리패 <수업>에서 봤을 때, 하녀 역할이 인상에 깊게 남아 기억하고 있다. 입구에 표를 받고는 곧장 연기로 들어갔으나 흔들림없이 대담했고, 부조리극 <수업>에서 격정을 펼치는 교수/학생 사이 중심을 잡고 조율하는 비밀을 품은 복잡한 역할을 무척 잘 소화했다. 이승헌 배우의 독무대나 다름없는 작품에서 짧게나마 그 에너지를 잘 받아냈다고 할까. 그래서 서늘한 인상이 워낙 깊게 남아서인지 이번 작품에서 넉살맞은 60대 아줌마 역할이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극단 걸판 대표이자 배우인 최현미
“내가 쓸 수 있는 글을 쓰겠다”는 오세혁 작가 말처럼 비극 대신 작은 위안을 관객에게 주는 작품을 쓰고 연기하고 연출하겠다는 포부는 소중하다. 다만 대사의 맛을 살려야할 빠른 리듬으로 진행하는 극이라 이른바 루저로 불리는 그들의 삶을 깊게 받아들일 여지는 많지 않다. 그 몫은 어쩔 수 없이 배우들이 나눠서 짊어 매야 하는 부분이다. 분식집 주방 아줌마로 살아온 엄마 역 최현미 배우는 극 내내 김밥을 말고 썬다. 극장에 풍기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에 배가 꼬르륵 거리지만, 무능한 남편과 꿈만 좆는 아들의 몫까지 극중 엄마에게 얹힌 무게가 커서 자칫 그 김밥을 먹었다간 체하겠다 싶다.
연작 사이, 무대를 정리하는 와중에 극중 싼 김밥을 관객들에게 제공을 했다. 관객들 틈에서 집어먹은 김밥은 꿀맛이었다. 작품을 올리기 전에 싸놓은 김밥이나 극중에 한풀이 연기를 하면서 싼 김밥이 차이 없이 고르게 맛있다. 푹푹 찌는 한 여름 내내, 부산과 밀양을 거쳐 서울에 올라왔으니 그 와중에 내내 음식에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되었을 일이다. 자칫 관객이 배탈이라도 났다가는 괜한 얘기만 들을 일, 최현미 배우는 혹은 그들은 내내 두루 조심하면서 푸짐하게 김밥을 쌌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쭉정이처럼 얇고 단무지만 두꺼운 **천국 김밥만 먹다가 양도 푸짐하고 맛도 좋은 김밥을 먹으니 염치없게도 자꾸 손이 간다. 이런 게 작가가 말하는 관객을 위한 위로일까. 김밥은, 이해타산을 따지는 현실과 다르게 싼 김밥은 분명 소품인데 애증이 가득한 부부, 모자 관계에서 그 끈끈함이 배어나온다.
두 작품에서 말하는 60대 노인 문제, 30대 취업/비정규직 문제, 40대 조기 퇴직 문제 등 이 사회 거의 모든 계층에 걸쳐 시대 유감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놓았다. 하지만 팍팍한 인생을 살아가느라 굳은살이 박힌 시선으로 보자면 그 마지막 작은 위안을 두고 편하게 마음 놓을 수만은 없어 보인다.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은 갈수록 퍽퍽해질 게 뻔하고, 그들이 기댈 데라곤, 복권이나 정치인들의 공허한 복지 구호처럼 점점 신기루가 되어가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은 현실을 그대로 카피하는 자리가 아니라고들 한다. 무대가 연극 자체 또 다른 세상을 구축하는 곳이라면 조명이 꺼진 뒤 그들의 삶을 비극으로만 볼 건 아니다.
아들은 작가로 데뷔를 해서 받은 돈으로 아버지가 부동산을 하면서 용케 싸게 구한 가게 터에서 어머니가 분식점을 떡하니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크리스마스...). 두 부부는 이웃사촌으로 누구보다 서로 속사정을 잘 아는 만큼 먼저 재취업에 성공한 쪽이 나머지를 밀거니 끌거니 하면서 서로 의지를 해나갈 것이다. 어쩌면 두 집안이 작은 사업체라도 꾸릴 지 누가 알겠는가(아빠들의...). 배우들이 싸준 김밥 한 줄은 스스로 그 한 줄의 가치를 아는 자들이 싸준 음식이라서일까, 참 맛이 좋다. 당신은 배우가 마음으로 싸준 김밥을 먹어본 적이 있는가. 참 행복한 경험이다.*
사진출처 - 경향신문, 민중의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