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하녀들] 성북동 비둘기의

구보씨 2010. 9. 1. 18:10

3년 남짓, 공연을 보다보니 연극이 책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대형출판사에서 나온 베스트셀러가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읽고 싶었던 책들은 절판이 되었거나 18개월이 지나도 할인을 하지 않거나. 홍보기획사를 통하지 않으면 좀처럼 알려지기 힘든 공연계에서 성북동비둘기라는 극단을 알게된 건 크나큰 행운이다. 얼마 전 국립극단 <보이체크>를 봤고, 오늘 저녁 명동예술극장 제작 <우어 파우스트>를 볼 예정이지만 (두 작품 모두 외국인 연출가 작품이다) 가장 기대가 큰 작품은 성북동비둘기의 <하녀들>이다.
 
우선 어떤 식으로 풀어낼지 전혀 짐작도 가지 않기 때문이다. 9월부터 10월까지 장기 공연을 올리는데, 1만5천원이면 소극장 연극의 반 값밖에 되지 않는 가격이다. 내 고민은, 성북동비둘기의 작품을 보고난 뒤 어떻게 후기를 적어야 할 지 늘 부담만 가지고 있다가 쓰지 못한다는 점이다. 심상치 않은 행보를 보이는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하녀들>(9/10, 두산아트센터)과 함께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장 주네의 <하녀들>을 그간 5편 정도 본 듯하다. 각각 극단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작품들이라 대부분 만족스러웠다. 김소희, 배보람이 열연하는 연희단거리패의 <하녀들>이나  마임이 강점인 극단 푸른달의 <하녀들>의 문틀을 이용한 오브제 공연이 기억에 오래남는다. 

극단 푸른달의 [하녀들] 지독한, 그래서 꼭 봐야하는 
http://blog.daum.net/gruru/65
연극실험실 일상지하 과거의 기억 [혈맥] http://blog.daum.net/gruru/164



[작품소개] 

apply to a play! 주네의 <하녀들>은 애초에 수많은 극중극의 겹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그 세계 속에서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하녀라는 인물들은 누구이며, 그들의 실제 감정은 무엇인가? 

혹 그들은 매순간 '실제'로서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이 전부 '연극'에 불과한 거라면?

이렇듯 <하녀들>은 연극에 대한 이야기와 결부되어 있다.

이 공연은 바로 그 겹침과 혼돈에 대한 격렬한 폭로이고자 한다.

원작의 내용은 보다 극단화되어, 본 공연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하녀들은 마담의 애인 무슈에게 강간을 당했고 그로 인해 무슈를 방금 살해했다.

무대 한 켠의 박스(원작에서의 의상 박스)에서는 무슈의 시체에서 나오는 피가 흘러나온다.

끌레르와 쏠랑주는 몰입과 긴장 속에 살인의 흔적을 지우면서, 보다 완벽한 범죄를 위해 마담을 죽이기로 합의한다. 

그들은 충격과 공포, 그리고 쾌감에 휩싸여 있다.

그런데 마담이 등장하면 이야기는 갑자기 다른 상황으로 분열된다.

마담은 (언제나) 하녀들이 속한 세계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다짜고짜 마담은 '이런 식의 연극은 마음에 안 든다'고 시비를 걸며 등장한다. 마담의 등장으로 인해 하녀들이 하고 있던, 

또는 살고 있던 모든 것은 '연극'이라는 틀 속으로 갇히게 되고, 

살인의 공포 및 또 다른 살인을 향한 두려움에 떨었던 그들의 실제적인 시공(時空)은

'연극'이라는 잣대로 비판받고 갈기갈기 조각나 버린다.

그리고 이때 마담이 이야기하는 ‘연극’은 소위 ‘드라마 연극’이라는 것에 국한된다.

마담은 연극이란 드라마적 재현에 충실해야 한다는 식의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글들을 읽으며 하녀들의 연극을 계속해서 비웃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마담의 폭로(모든 것이 연극에 불과하다는)와 멸시(그들이 일삼는 표현은 연극도 아니라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녀들은 자신들만의 시공을 살아간다.

이렇듯 공연에서 제시되는 상황이나 시선은 여러 겹으로 겹쳐져있고, 

따로 노는 듯하지만 같이 가며, 또는 같은 이야기인 것 같지만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

요컨대 살인의 공포나 마담의 횡포로 인해 모멸감에 떠는 원작의 하녀들과

불안과 혼란 속에 놓인 연극(포스트드라마 연극, 혹은 특별히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연극)은

뚜렷한 구분 없이 겹쳐지고 또 분리된다.

연극을 이야기하기 위해 원작의 대사가 사용되기도 하고, 원작의 이야기 속에 연극의 이야기가 암시되기도 한다.

또 연극에 대한 고민(현대 연극의 한계와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위치 및 역할)과 원작의 인물들의 고민(하녀들의 벗어날 수 없는 죄의 족쇄)이 무수히 겹쳐지기도 한다.

불규칙하고 파편적인 에너지, 그 감각의 단절만이 여운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 혼돈으로부터 관객들이 느낀 고통은 하녀 또는 연극이 겪고 있는 혼돈과 고통에 참여하는 실질적인 하나의 체험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체험으로부터 시작해, 결국 ‘감각’을 넘어 ‘의미’들을 읽어내는 데까지 이르러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연극이며, 하녀이며, (사실은 전부 하녀인)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