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데모크라시DEMOCRACY_한예종] 무대와 객석의 멋진 전복

구보씨 2011. 6. 2. 11:49

제목 : 2011 연극원 스튜디오 공연 전문사 연출Ⅱ : 데모크라시DEMOCRACY

기간 : 2011. 6. 2(목) ~ 2011. 6. 4(토)

장소 : 한국예술종합학교 석관동 예술극장

원작 : Micheal Frayn

번역/연출 : 이동선

드라마터그 : 전강희

출연 : 성건제, 권태건, 박찬국, 김성환, 조정문, 장한얼, 윤 박, 차승호, 박 웅, 마두영

제작 :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무대 안으로 객석을 끌어안는 무대 미학은 단연 돋보이는 <데모크라시DEMOCRACY>의 장점이다. 작년 이맘때인 6월 4일, 같은 극장에서 올라간 레퍼토리 공연 <서푼짜리 오페라>로 먼저 선 보인 형식이나, 이번 작품은 객석마저 무대로 활용하면서 한결 나아간 해석으로 보인다. 직사각형 무대를 두고 6면으로 객석을 배치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국회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모니터링하듯 설정한 상황도 정치극 전반의 취지와 잘 맞아 떨어진다.

 

<데모크라시>는 독일의 정치가이자 반(反)나치스 운동가이고 독소조약 체결 등 소련·폴란드·동독을 중심으로 ‘동방외교’를 추진, 동서의 긴장 완화를 위해 노력했고 동독을 국가로 인정, 양국의 안정에 기여한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Willy Brandt(1913.12.18~1992.10.8)의 파란만장한 정치인생을 다룬 희곡으로 극작가이자 소설가로 유명한 마이클 프레인 작품이다. 마이클 프레인은 작년 극단 청맥의 <코펜하겐> 과 소설 <곤두박질>로 우리에게 알려진 바 있다.


전문사 공연이니 기성 무대에서 활약하는 연극인들과 다를 바 없는 기량을 펼치리라 생각하는 한편, 2시간 30분이 넘는 작품이자 연출 이동선이 번역을 맡은 국내 초연작이라 기대하는 한편으로 우려가 되는 부분이 없지 않다. 객석으로 둘러싼 무대 위에는 양쪽으로 위에서 내려온 마이크가 달려 있고, 수상이 된 빌리 브란트가 주로 머무는 자리에 책상과 의자가 있을 뿐, 심플하다. 사방으로 트인 무대는 어디로도 등퇴장이 가능하고 무대 아래 의자는 친구이자 2인자나 연정을 맺었으나 수상 자리를 탐내는 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실제 정치현장을 가보면 열린 무대가 아닌 일방적 독점 무대를 선호하는데, 사방을 튼 열린 무대는 실제 현장과는 어긋난 듯하나 대결로 정치 현장의 특징을 잘 살렸다. 객석 위치에 따라 배우 전면 혹은 후면이 보이는 배치는 각각 주로 차지하고 앉은 위치에 따라 정치 성향에 따른 지지자를 거느린 효과를 자아낸다. 그러면서도 배우의 고른 배치와 동선으로 객석 위치에 따라 생길 수 있는 사각을 최대한 줄였다. 무대를 채우는 대신 비움으로 정치적 모략과 속임수와 배신이 배우들의 입을 통해-정치 성향이 그렇듯-잘 표현했지만 2시간 30분이 넘는 작품 특성상 지루해질 여지가 없지 않다.  




그에 대한 염려였는지, 주인공 빌리 브란트가 정치 선전을 위해 기차 여행을 할 당시 무대 중간부가 상승하고, 휴가를 떠날 때 반대로 하강하면서 높낮이로 조율를 하는데, 사실 그 노력만큼 환기 효과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다만 선동자로 빌리 브란트를 부각하기 위해, 연단을 올린 점이 이해되고, 사생활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무대를 낮춘 점 역시 작품 성격과 맥이 통하는 지점이다.


오랜 친구였으나 동독스파이로 밝혀진 비서 권터 기욤과, 결국 스파이 사건으로 수상 자리를 사임한 빌리 브란트와의 관계는 이 작품이 단순한 정치 다큐가 아닌 연극으로 재미와 의미를 선사한다. 보잘것없는 신분으로 정치인들 사이를 맴도는 그는 작품에서 퇴장하는 법이 거의 없이 무대 위에 머문다. 작품이 기욤의 회상극으로 진행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인간적으로 빌리 브란트에 매료가 되고, 이제는 정치적으로도 지지를 보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빌리 브란트는 폴란드 비내리는 바르샤바 게토 봉기 기념비 앞에서 전후 처음으로 폴란드를 방문한 서독 총리로 무릎을 끓고 눈물을 흘렸다. 그 자신은 반 나치주의자였으나 나치 독일 죄상에 대해 전세계에 용서를 빌었다. 서독인들은 이 사건을 치욕적인 사건이라고 비판했지만, 역사는 가장 자랑스러운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유명 한 이 사진은 연극에서도 구현되는 바, 빌리 브란트가 과거와 이념을 뛰어넘은 정치인으로 권터 기욤이 동서독 이념의 틈에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한편으로 객석 가까이 조명이 흐릿한 경계에는 권터 기욤을 관리하는 동독 요원 아르노 크레츠만이 돌아다닌다. 관객의 시선으로 무대 위를 바라보는 그로 인해 권터 기욤이 있는 자리는-이 역시 정치 무대의 특성이지만-꼭두각시 광대가 서 있는 무대를 연상케 한다. 빌리 브란트를 사랑하였으나 그를 내쫓은 장본인으로 권터 기욤은 매우 연극적인 인물이다. 

 

연출의 백미는 마지막, 무대 막이 올라갈 때이다. 빌리 브란트를 앞에 두고 뒤에서 객석이 올라가면 정치인들이 객석에 앉아 있다. 빌리 브란트 사임 이후 그들이 독일 정치사를 떠맡았으나 역사의 큰 획이라는 점에서 빌리 브란트에 비해 주변부 인물일 수밖에 없다는 상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판이라는 게 고난도의 연극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한편, 정치인 몇몇이 다가 아니라 앉아 있는 관객들이 무대 안에 들어와 있듯 그를 지지하거나 혹은 내치는 데에 유권자의 역할이 동일하게 중요하다는 점 역시 상기시킨다. 




검은 막이 걷히면서 무대 안으로 들이차는 스모그는 빌리 브란트로 인해 촉발된 베를린 장벽 붕괴 현장을 제대로 재현한다. 이전까지 빌리 브란트에 관한 수많은 사건사고들이 후일담 형식으로 다소 지루하게 언급된다면 오히려 빌리 브란트가 총리를 내려놓고 수십년 뒤 세기적 사건을 끌어와 합치시키면서 극 효과를 잘 살렸다.

 

작품 전반으로 미니멀하게 구성하여 끌고 가면서도 전체적인 맥을 제대로 집어내고, 최대한 극장을 활용하여 효과를 최대화한 연출은 학생 발표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노련하다. 무대 설비와 소품이 연극의 최대 장점인줄 아는 대형기획사들의 물량 공세에 질린 요즘, 꽤 신선하면서도 손꼽이는 수작이다. 다만, 무대 안으로 간이 객석을 끌고 오면서 전후좌우 관객 움직임이 그대로 전달되는 등 몰입에 방해가 되는 부분은 감수할 부분이지만 좀 아쉽다. 한국 정치사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 하나 익숙지 않은 독일 상황을 무대로 옮긴 터라 뒤와 옆자리 관객이 지루해할수록 점점 그 움직임이 커지는 게 느껴졌다.

 

정치극이라는 점과 객석과 무대의 전복 활용 등은 흥행을 고려하지 않는 학교 발표작이라서 가능한 부분일 수도 있다. 학교작으로 제작비, 여건 등 부족한 만큼 장점을 충분히 활용한 데에는 박수를 보내지만 한편으로 이동선 연출의 프로 무대에서 작품이 기대되는 한편으로 우려가 되는 부분이다. 다목적 극장인 한예종 예술극장은 마이크 사용없이 연극을 올리기에는 목소리가 울리는 경향이 있어서 다소 부적합한 편이다. 게다가 대사 위주인 <데모크라시>의 경우라면 피해야할 선택이기도 하다. 하지만 작품성을 확보하기 위해 객석을 포기하는 방식의 연출은 기성 극단에서 좀처럼 구현되기 힘든 부분이다. 역으로 그래서 이번 공연이 꽤나 반가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총 4회 짧은 공연이라 평가하기에는 무리이나 마지막 날 마지막 공연이라고 보면, 대사가 중간중간 엉키는 부분은 아무래도 아쉽다. 그래도 대사 위주의 공연인 만큼 배우들의 역량이 꽤나 중요한데, 기대했던 이상이었다. 마지막 막이 열리는 순간 극장 전체를 활용한 멋진 연출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