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밀하게 포착한 TNT레퍼토리의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Krapp's Last Tape]
제목 :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Krapp's Last Tape
장소 : 노을소극장
배우 : 김준삼, 권남희
기간 : 2011. 5. 4(수) ~ 2011. 5. 10(화)
원작 :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번역/연출 : 이지훈
제작 : 극단 TNT레퍼토리
5월 4일부터 10일까지 사무얼 베케트를 주제로 제3회 현대극페스티벌이 열렸다. 부조리극의 시초랄 수 있는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작품을 두루 아우르고 있지만, 작가의 명성에 비하면 알려지지 않은 채로 조용히 끝났다. 6곳 극단이 함께 기획을 했지만, 입소문만으로는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연극 장르만 해도 대학로에서 수많은 기획과 광고물이 다툼을 벌이는 상황이라, 사실 뛰어난 기획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작품 완성도와 상관없이 관객 평가조차 받기 쉽지 않다. 대학로 안에서도 나름 고독한 ‘고도’ 혹은 독거노인 '크라프'였던 셈이다.
그중 한 작품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를 우연치 않은 기회에 봤다. 노을 소극장과 청운예술극장, 대학로 작은 소극장 두 곳에서 열린 페스티벌은 한 극장마다 하루 3편 혹은 2편씩 올리는 방식이라, 무대를 수시로 교체해야 한다면 세트나 조명의 영향을 덜 받는 소극장 공연이라도 해도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작아도 내공 있는 극단이 대학로를 뒷받침하는 힘이라는 걸 극장을 다니면서 몸으로 체득했고, 베케트 작품이 미니멀한 편이기도 했다. 작품을 보기 전에 판단을 내리는 건 무리다.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는 작년 2010서울연극올림픽과 국립극장페스티벌 개막작으로, 사무엘 베케트라는 작가의 명성보다 포스트모더니즘 연출가 로버트 윌슨의 작품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 당시 굳이 세계적 공연예술 축제를 동시에 진행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는 얘기가 돌았다. 그 와중에 작품 선정이나 수준을 놓고 경쟁할 수밖에 없었던 만큼 라이벌 양상을 띄었는데, 로버트 윌슨의 작품은 양대 페스티벌이 개막작이라고 내세웠을 만큼 (한편으로 실소가 나오지만) 이런저런 유명세를 단단히 탔다.
로버트 윌슨
반년 남짓 지나 극단 TNT레퍼토리가 연극인들이나 관객들 사이에 작년 로버트 윌슨 작으로 알려진 작품을 어떻게 부담을 씻고 올렸을까가 사실 관심사라면 관심사였다. 더불어 작년 서울연극올림픽에 극단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도 공식 초청작으로 올라간 바가 있는데, 워낙 임영웅 연출이 40년이 넘도록 고유 레퍼토리로 꽉 잡고 있는 작품이라 이번 페스티벌에서 극단 노을이 풀어내는 <고도를 기다리며>도 관심사이다.
연극이 시작되면 우선 배우 권남희가 극중극 형태로 작품을 소개하는 교수 역으로 나와 관객과 대화를 시도한다. 'Krapp'가 발음상 'crap'와 같으며 이 단어는 속어로 '똥', '허풍', '쓰레기' 같은 의미가 있다는 설명에서 크라프가 별 볼일 없는 초라한 인물로 설정을 했을 것이며,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와 사무엘 베케트와의 관계를 들어 작가 자신을 시사한다는 설명을 보탠다. 정적이고 지루할 수 있는(지루할 수밖에 없는) 연극에 보다 의미부여를 하는 셈이지만 한편으로 아버지, 교사, 상사, 이웃집 아저씨 등등 다양한 인물로 대입할 수 있는 상상력을 제한하는 셈이기도 하다.
로버트 윌슨 연출작으로 언급하는 대목에서 대극장보다는 소극장에 잘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데에 동감한다. 정적인 1인극을 대극장에서 올린다는 건 작가와 연출/배우의 유명세를 배제하면 관객 평가에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단순히 배우에 의존하는 작품이 아니라 무대나 세트 자체가 한 남자의 ‘진짜’ 인생을 보여주는 주역이고 배우는 단지 기대, 희망, 절망, 사랑 그 무엇도 없는 ‘껍데기’ 인생이라고 본다면 로버트 윌슨의 대극장 공연 해석이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영어로 진행된 작품이라는 한계도 과장된 이미지가 극복할 수는 있지만 가부키에서 착안한 분장 등 덜어내려는 베케트의 의도를 역으로 해석한 과잉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두고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로버트 윌슨
TNT레퍼토리가 올린 작품은 확실히 한결 친절하고 세심하다. 앞서 배우가 극을 소개하기도 했고, 노인이 릴 카세트를 다루는 신경질적이고 때로는 부드러운 손 움직임을 눈앞에서 볼 수 있으니 세심한 감정 변화라 눈에 들어온다. 릴 카세트를 다루는 몇 가지 단순한 동작, 즉 테이프를 꺼내고 확인하고 카세트에 걸고, 틀고 끄는 일련의 단조로운 동작은 단순히 조작법을 보여주는 건 아니다. 스스로 멍청이 혹은 애송이crap라고 화를 내는 허무한 인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우리가 평소 사는 패턴이 그와 다를 게 뭐가 있을까 말인가.
하루하루 고도를 기다리는 식의 무의미한 반복이라는 회한이 들지만 어쩔 수없이 같은 하루를 마주하고 마고 끝내는 지독스러운 습관과 패턴의 동물이고 보면 말이다. 크라프의 인생은 궁금할 게 없고 노인이 오가는 느릿한 몸짓 역시 마찬가지이다. 무대를 비웠을 때 뒤로 비치는 그림자는 의도한 바로 보이지는 않지만 병을 따고 술을 따르고 마시는 일련의 과정을 인위적인 음향 효과로 스피커를 통해 내보내는 방식은 그의 현재 삶 역시 테이프 안에 담긴 자신의 삶, 스스로 모멸했던 삶과 다르지 않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작품이 섬세한 만큼 조금씩 호흡이 맞지 않는 음향, 조명 등은 앞서 얘기했듯이, 한 극장을 세 작품이 쓰면서 생기는 한계를 보여준다. 연극에서 극장이 곧 상상력의 크기이고 무대와 세트가 그 상상력이라고 한다면 소극장 내 간소하게 마련한 세트는 상대적으로 인생의 허무를 과하게 축소한 셈이 된다.
어쨌거나 인생의 허무 혹은 고독을 드러내는 원작 취지에서 보면, 세계적은 각광과 환호를 받는 로버트 윌슨보다는 대학로 작은 극단인 TNT레퍼토리가 더 절절할 것이다. 좋은 연기를 펼친 김준삼 배우를 비롯하여, 진중한 무대로 대학로에서 무게 중심을 잡아준 현대극페스티발위원회에 박수를 보낸다.*
사진출처 - 극단 TNT레퍼토리, 국립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