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 외

[다녀오세요, 구두가 말했습니다Ⅱ_NEWWAVE 공연예술 축제 페스티벌 場 2009] 욕망을 둘러싼 실체와 허상의 충돌

구보씨 2009. 10. 13. 10:35



욕망을 둘러싼 실체와 허상의 충돌 

제목 : 다녀오세요, 구두가 말했습니다Ⅱ - 김윤진 댄스컴퍼니 

일시 : 2009년 10월 13일(화) 늦은 4시, 8시
장르 : 무용+영상 
안무 : 김윤진
연출 : 김윤진
출연 : 임소연, 백은하, 김윤진



뉴웨이브 공연예술축제 2009 페스티벌 장(場)’이 7일부터 16일까지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열린다. ‘페스티벌 장’은 1997년 극단 사다리의 정현욱 대표가 중심이 돼서 마임이스트 유진규, 극단 여행자 대표 양정웅, 무용가 박호빈씨 등이 참가하는 실험축제로 2001년까지 계속됐다가 재정난 등으로 중단된 것을 이번에 서울문화재단(대표 안호상)과 한국공연프로듀서협회(회장 정현욱)가 부활시켰다. 이번 축제에는 4관객프로덕션, 김윤진댄스컴퍼니, 극단 몸꼴,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와 도쿄데스락 등 4개의 젊은 단체가 참가해 정형화된 문법을 탈피, 새로운 공연을 선보인다. 

문화일보 09-10-07일자  '무대위 새로운 물결… 신선한 감동의 파도' 기사 발췌

 

“공연장을 나서는 관객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 
<다녀오세요, 구두가 말했습니다Ⅱ(이하 구두Ⅱ)> 안무,연출 김윤진이 쓴 글 첫 문장이다. 글쎄, 난 공연을 보고 나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더라, 두 번째 구두라면 신상인가? 연예인 서인영이 자연스럽게 뒤를 따랐고, 그러니 방금 보고 나온 <구두Ⅱ>가 머릿속에서 죄 흩어져 날아갔었다. 제길, ‘빅브라더’는 모니터나 몰래 카메라가 아니라 무의식에 박혀 있다고 누가 술 먹고 그러던데. 


공연을 보고 나오니 비가 내릴 요량인가, 바람이 세게 분다. 흠칫 놀라 고개가 쑥 들어간다. 제길 머릿속을 비우는 일, 두 번째 공연까지 페스티벌 場이 요구하는 전환이다. 새로운 공연 방식은 기존의 익숙한 해석을 방해하고 나선다. 머리를 비울 것, 엉덩이가 꽃처럼 달처럼 피어나는 <구두Ⅱ>의 방식처럼 상방과 하방을 뒤섞을 것. 쑥 들어가서는 위치가 바뀐 머리로 살 것. 김윤진의 물음에 대답을 찾자니 이것이다.


뒷자리더라도 중앙에 앉을 것. 영화처럼 카메라가 알아서 시점을 잡아주지 않으니 최대한의 시야를 확보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구두Ⅱ>는 무대 오른쪽을 주로 사용한다. 순간, 당황스럽다. 중앙 좌석이 구석진 자리가 되고 말았다. 뒤에서는 무용수의 얼굴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큰 틀거지에서 보는 습관이 공연 관람을 망칠 수도 있다고 후회하면서 배운다. 중앙과 변방의 교체, 편견을 갖지 말 것, 혹은 긴장을 풀지 말 것. 또 하나 배운다.


무용수는 불이 들어온 사람 크기의 흰 바탕 막 앞에서 몸을 슬슬 흔든다. 무용수의 그림자가 막에 실체와 다른 춘을 선보인다. 실체는 변하지 않지만 막 위에는 원근에 따라 막을 완전히 지배하기도, 또 벗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시각예술가가 스크린에 핏빛의 점, 선을 새긴다.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날카로운 점과 선은 무용수의 율동에 따라 조응을 한다.


뭉글뭉글 부드러운 선은 동화 분홍신의 내용처럼 날카로운 욕망이 무용수의 몸을 관통하고 덮어씌운다. 이윽고 붉은 선은 동맥을 끊은 뒤의 붉은 피처럼 배우의 몸을 물들이는데, 피와 살이 욕망으로 가득 차는 순간이다. 피와 살과 욕망은 이제 하나가 되었다. 스크린의 그림자와 그 앞의 무용수의 경계는 이제 무의미하다. 에고(ego)의 옷을 입은 벌거숭이 임금님처럼 무용수가 몸을 거꾸로 세우자 벌거벗은 엉덩이가 드러난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뻗은 무용수 발에 붉은 선은 빨간 분홍신을 신기고, 욕망의 허상이 드러난다. 막에 비치는 무용수의 벌린 가랑이는 한송이 꽃처럼 보인다. 꽃이 식물의 생식기이고, 유혹의 상징이고 보면 절묘한 묘사이다.


무용수의 움직임에 따라 막에 거대하거나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가 허상으로 생기지만 스크린에서 눈을 떼면 무용수의 무의식적인 몸짓과 그 바로 앞 객석 맨 앞자리 바로 앞에서 마우스를 돌리는 시각예술가, 그리고 그 옆자리에 앉아 이 모든 걸 조율하는 연출 김윤진이 앉아 있다. 실체가 드러난(혹은 드러낸) 셋은 화려한 허상과는 정 반대로 권태로워 보인다.



그러나 객석을 뒤로 거느리고 드러낸(혹은 드러난) 모습도 실체가 아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가 시작되면 시각예술가가 마우스를 놓고 직접 무대 위로 나서고, 세 번째 에피소드가 시작되면 연출까지 무대로 나선다. 그렇게 매 에피소드마다 각자 역할을 맡은 배우일 뿐이다. 강렬한 첫 번째 에피소드와 나머지 두 에피소드가 유기적으로 연결한 부분으로 나란히 줄을 꿰듯 배우, 스텝, 연출이 줄줄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내가 규정지은 각각의 역할 기준은 의미가 없다. 실체라고 믿었던 것은 역시 허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실체는 어디에 있는가? 어두운 극장, 실체와 허상의 혼돈, 딱 플라톤의 동굴 비유다. 허상이 욕망으로 대변되는 가상이 현실보다 우위를 지배하는 시대에 우리는 플라톤의 동굴처럼 우리에게 실체(idea)는 잔인한 진실이라서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진실을 말하는 자를 돌로 쳐 죽였다고 하는데... 무용수→시각예술가→연출에 이어, 그 뒤에 관객으로 앉은 나도, 실은 실체라고 믿고 있는 나 스스로도 실체가 아닐 수 있다는 인식 전환을 불러 일으킨다. 야금야금 들어오는 핏빛 점, 선처럼 난 고작해야 구두를 보고서 서인영의 신상을 떠올리는 수없이 떠도는 욕망 혹은 허상에 피와 살을 빼앗긴 분신이 아닌가.


무용수과 시각예술가가 서로 번갈아 가면서 몸으로 표현하는 침대가 혹은 의자가, 침대가 혹은 의자가 아닌 무대에서는 실체가 없고, 모호하고 애매한 허상만 있다. 연출 김윤진은 싸고 먹는 행위 역시 의심을 해봐야 한다고, 천연덕스럽게 선 채로 오줌을 싼다. 식빵이 식빵이 아닌 게 손으로 쳐서 무참히 찌그러트려 머리 위에 쓰며 조롱을 한다.


누구라도 서서 오줌을 쌀 수 있고, 누구라도 식빵을  우그러트려서 머리 위에 얹혀 장식할 수 있지만 ‘당연한 상식’으로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들을 비상식 혹은 미친 취급하는 그 ‘당연한 상식’의 세상은 과연 실체인가?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자연스러움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런 행동은 우리가 치매를 늙음에 뒤따른 자연스러움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느끼는 늙음에 대한 '식적인' 역겨움에 대한 믈음이다.혹은 치매가 걸린 세상에 대한 반기!)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녀오세요, 구두가 말했습니다Ⅱ”의 인사를 받고 무대를 나서는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김윤진 댄스컴퍼니의 두 번째 작업은 세 번째, 네 번째 계속 이어질 테지만 동굴(무대)로 돌아왔을 때, 이들의 작업이 과연 동굴에서 돌팔매 대신 박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는 그들의 몫인 동시에 동굴을 나서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이 달라져서 다시 돌아올 것인가, 를 고민해야 하는 나의 몫이기도 하다. “새로운 발견에 대한 떨림과 야릇한 흥분, 삶을 환기시키는 충격과 각성이 출렁이기를 늘 기대합니다.” 김윤진의 기대가 적어도 나에게는 피와 살의 실체의 단서로 되돌아왔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사진출처 - 페스티벌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