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기다리면 반드시 [버스가 온다]

구보씨 2008. 12. 4. 15:12

지금은 꽤 많은 레퍼토리를 갖춘 젊은 극단 극발전소301의 2008년 창단 공연 리뷰입니다. 첫날 공연을 봤으니 어쩌면 두고두고 기념할 일일지도 모르겠네요. 창작극만 올리겠다는 그들의 의지는 아무리 사정이 각박해도 현재진행형입니다. 재기발랄함에 두루 내공을 쌓았지요. 창단 공연을 보고 한 동안 그들의 작품을 꾸준하게 봐왔는데요. 


어느 순간부터 극발전소301 작품을 보질 못했습니다. 안 봤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왜 그런지 모르지만, 그들도 안중에 없겠지만 왠지 소원해진 느낌이 듭니다. 가끔 공연 소식을 들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합니다만. 구차한 변명이나 어쩌면 믿음이 있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매년 겨울이면 창단공연처럼 서로 다른 듯 연결되는 에피소드 작품을 올렸는데요. 올 겨울 유독 춥게만 느껴지는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건투를 빕니다.


 


버스는 공평하다. 정해진 정거장이 아니면 힘이 세고 돈이 많다고 해서 가고 싶은 데로 맘대로 갈 수도 없고, 마음대로 내릴 수도 없다. 먼저 탄 사람이 먼저 앉는 게 도리다. 시끄럽게 떠들거나, 노인에게 양보를 하지 않거나, 싸우거나 운전사에게 시비를 거는 등 괜한 객기를 부렸다간 다른 승객들의 눈총과 질시를 받기 십상이다.

 

극발전소301의 창단 공연 <버스가 온다>의 첫날 첫 공연을 봤다. 그러니까 신생 버스회사의 첫 버스가 첫 운행을 하는 날이다. 새로운 버스 노선은 서민들에게 즐겁고도 반가운 일이다. 버스 뒷좌석처럼 오밀조밀 뭉쳐 앉은 승객들은 느긋하니 잔뜩 기대를 품은 듯한데, 기사는 짐짓 가슴이 떨린다. 기사나 차장이나 정비사 나름 경력직이라고는 하지만 새 노선, 첫 출발인데, 제대로 운전할 수 있을까? 내심 기대 반, 우려 반이다. 

 

승객들은 대학로에서 출발하는 수많은 버스들 중에서 301번을 기억해줄까? 환승을 하기 위해서 탄 승객도 있을 테고, 잠깐 쉬어갈 요량으로 딴 승객도 있을 것이다. 버스를 타고 난 소감도 다 제각각일 터. 그래도 극발전소301이 첫 공연으로 버스를 택한 데에는 소시민들의 발이 되고자 하는 의미를 잘 살렸다면 승객들은 만족할 것이다. 301번 버스의 운행표에 따라 세 곳의 정거장 풍경을 둘러봤다.

 



첫 번째 정거장 <타임버스>

바람둥이 아버지를 따라 어머니가 열세 번이나 바뀌는 가슴 아픈 어린 시절을 보낸 유명 영화배우 윤택경. 30여 년 전, 자신을 임신한 어머니가 기쁜 마음에 버스 정거장으로 마중 나왔다가 아버지 영국의 바람기를 알게 되면서 벌어진 일을 막으로 <타임버스>에 몸을 싣는다. 바로 불행의 순간을 막아보려 과거로 떠나는 눈물어린 가정파탄방지극! 허나 과거를 바꾼다는 게 만만치가 않다. 어찌어찌 과거를 바꾸지만 그로 인해 또 꼬이고 꼬이는 미래. 간단하지만 재치가 돋보이는 SF효과가 놀랍다! 그리고 과거를 바뀌는 자체가 불법인 상황에서 택경의 뒤를 쫓는 타임수사대…. 법을 어겨서라도 가족의 행복을 찾겠다는 택경의 선택은 어떤 미래를 가져올 것인가? 버스라기보다는 택시에 가까운 타임버스는 행복을 줄 수 있을까?

 

시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사실 버스가 필요할까. 천천히 가다가 쉬어가면 그만 아닌가. 하지만 누군들 자유로울 수 없는 시간의 제약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아예 없는 걸까. <타임버스>는 그나마 평등한 시간마저 돈으로 좌지우지하려는 욕심을 상상력을 보태서 풍자한다. 등장인물들은 힘들고 지루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과거를 송두리 채 바꾸려고 하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다. 아니, 만만치 않은 게 아니라 지금의 내 모습은 그 고단한 삶을 견디고서야 가능하다는 걸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준다. 그러니 지금 나의 현실이 비루하다고 탓할 필요가 없다. 미래의 모습은 현실을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에서 과거를 다녀오기 전과 다른 현재를 사는 그들의 모습은 그래서 초라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짧은 대화에서 미래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분명 그들의 미래에 그들이 찾아와 다시 과거를 바꾸려는 짓을 했을 것이고, 좀 더 풍자를 하려는 의도라면 그런 식으로 꾸며도 좋을 것이다.) 타임버스는 버스라기보다는 마음대로 어디든 갈 수 있는 택시에 가까운 이동수단이다. 허나 버스를 타면 이곳저곳 정거장을 거치고 나서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듯이 삶도 마찬가지라는 걸 보여준다는 점에서 보면 버스가 맞다.




두 번째 정거장 <정류장>

무시무시한 동급생 ‘언니’에게 맞고 사는 여고생 세영과 늘 부장 호출이면 껌벅 죽는 박순철, 모든 여고생들이 맞고 사는 건 아니지만 억눌려 사는 모습이 수순을 밝은 듯이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사는 인생들이다. 같은 버스를 타고 있지만 밤새 술을 마셔 속이 안 좋은 박순철은 거친 운전이 불만이고, 약속시간이 간당간당한 세영은 느긋한 운전이 불만이다. 그런데 전혀 예기치 않은 상황이 벌어진다. 한적한 정거장에서 버스가 멈춘 것이다. 다음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고, 둘의 초조함은 점점 도를 넘는다. 도로 공사 등 사정에 따라 큰길가에서 밀린 간이 매표소 할머니는 둘에게 시간을 견디는 방법을 전해준다.


아버지가 죽었다거나, 응급실에 실려 왔다는 거짓말을 할 정도로 가기 싫은 학교와 직장. 누구라도 집에서 일찍 나오기는 싫고, 종종 지각 사태가 벌어지는데 출근 시간의 버스기사는 시간의 강약을 조절하는 저승사자가 된다. 시간은 절대 똑같이 흐르지 않는다. 상대성 윈리의 복잡한 공식은 몰라도 “난로 위에 놓인 손에는 1분이 1시간같이 느껴질 테지만, 좋아하는 그녀와의 1시간은 짧은 1분같이 느껴질 것이다. 그게 곧 상대성 원리다”라고 아인슈타인이 든 예는 이해가 쏙속 간다.

 

약속시간이 코앞일 때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 기다리는 대상이 도저히 약속을 미룰 수 없는 회사 중역들이라거나, 껌 좀 씹는 학교 양아치들이라면 휴대전화는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자칫 거짓말이 들통 나서 회사에서 잘리거나, 매를 두 배로 벌수도 있다. 물론 시계를 보면서 “죽었다”를 중얼거리는 사람들의 간당간당한 목숨줄(?)은 저승사자의 살생부의 펄럭임(핸들링)에 따라 아슬아슬하게 고비를 넘길 수도 있다. 대신 드물지만 버스기사가 실제로 승객들을 저승길로 인도하는 안타까운 경우도 종종 뉴스에 실린다.

 

뜬금없는 장소에 내린 세영과 순철의 시간은 시간차를 두고 급박하게 흘렀다가 멈추기를 반복한다. (그나마 복안이 세영보다 좀 더 세상을 안답시고 여유를 두고 버스에 올랐다지만, 상황이 바뀌지 않은 한 그 차이는 찰라에 불과하다.) 간이 매표소 할머니의 시간만 느긋하게 흐른다. 알고 보면 일일여삼추인 사람은 할머니다. 학교나 회사 지각 한 번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도 있지만 세찬 정치적 경제적 세파에 간이 매표소가 언제 철거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한 발만 뒤로 나서서 생각하면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하다는 걸 알고 있다. 누구에게나 시간이 똑같다면 마음먹기에 따라 지금 이 순간이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럼 할머니는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한 코 한 코 뜨개질을 하듯이 세월을 견디어 얻은 이치이다. 가끔 한 코씩 빼먹기도 하지만 그 정도는 다 따고 나면 목을 따뜻하게 감싸주기에 모자람이 없는 법이다.




세 번째 정거장

“아픔을 안고 사는 버스기사 재혁. 그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 진이 등장한다. 타인의 등장이 불편한 재혁. 하지만 진은 그의 삶에 젖어 든다. 그에게 늘 아프게 다가오는 정임은 변한 것 없이 그의 일상을 흔들지만, 진으로 인해 반복되던 굴레가 조금씩 변한다. 그렇게 세 명은 겨울을 지나 봄을 기다리는 마음처럼 점차 식구가 되어간다.” (연극 소개 中)

 

정임은 어느새 훌쩍 자라서 어설프게나마 가족을 꾸리고, 그 고리를 지키려는 재혁을 보면서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진 삶을 뒤로 하고 새로운 힘을 얻고, 재혁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작은 새 같이 여리고 위태로운 진과 인연을 맺으면서 정임과 자신의 아픈 과거와의 화해의 가능성을 찾는다. 정신연령이 낮은 진 역시 아픈 과거가 있다. 극에서 직접 드러나지는 않지만 ‘장갑’에 대한 강한 혐오와 두려움은 아비를 알 수 없는 임신을 한 상태로 버려진 상황과 이어진다. 입덧을 하는 진에게 재혁은 뱃속의 아이에게서 버려졌던 자신의 처지를 보듯이 “힘들게 하는 아이가 밉지 않느냐”며 병원을 가자고 말하지만 진은 생명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인다. 아비도 모르고 어미는 제정신이 아닌 채로 아이를 낳겠다는 게 ‘집착’이 아니고 뭘까.

 

허나 “너도 나도 엄마가 이렇게 힘든 걸 참고서 낳았을 것”이라는 진의 말에서 연극은 상처 입은 과거를 낙태, 즉 버림이 아닌 잉태, 즉 거둠으로써 역으로 버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버림의 순환은 과거의 재현이고 아픔의 반복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이치를 깨닫게 해준 건 아이이자, 점점 불러오는 배가 그렇듯이 시간의 힘이다. 나태하고 널부러진 시간이 아니라, 진이 어떻게든 허기를 채우려고 하는 모습에서 보듯이 견디고 또 견디려는 힘이다. 앞으로 태어날 아이는 이제 재혁과 정임에게도 과거의 흐름에서 헤쳐 나올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그러자 아이에의 강한 ‘집착’은 이제 가족 구성이라는 당연한 현실이자 미래로 탈바꿈한다.

 

재혁이 정임의 흔적을 따라 버스기사로 관광버스기사로 따라다녔다는 초기 설정은, 결국은 종점으로 다시 돌아오고 마는 버스처럼 벗어나려고 발버둥 쳐도 벗어나지 못하는 과거에 대한 은유로 읽혔다. 허나 마지막에 가서는 펑크가 나도, 고장이 나도 버스는 언젠가 반드시 돌아오듯이 미래에 대한 확신, 삶에 대한 희망으로 읽힌다.

 

<타임버스>가 괴로운 ‘과거’를 바꿀 수 있다는 상상을, <정류장>이 늘 시간에 쫓기고 얽매이는 ‘현실’을 보여준다면 는 언제나 ‘현재’형일 것 같은 ‘과거’를 치유하는 힘이 ‘미래’에서 온다는 걸 갈무리하여 보여준다. <버스가 온다>에서는 과거는 ‘상처’고 현실은 ‘집착’이라면 미래는 ‘희망’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앞에서 언급했듯 <타임버스>의 마지막 장면과 <정류장>의 할머니도 같은 맥락이다.

 



달려라! 301번 버스여!

실제로도 301번 버스는 혜화동을 경유하는 실제 버스노선이다. 부산, 인천, 안산, 수원에도 301번 버스가 있는데, 지역 공연을 다니면서 버스기사 분들을 모셔다가 공연을 해도 재미있을 것이다. (겸사겸사 후원도 받고) 돈 많은 사람들에게 신설 버스노선은 승용차 앞이나 가로막는 번거로운 일이다. 노선이 다니는 주민들에게는 반가운 일이긴 하지만 대단한 화젯거리는 아니다. 기름값도 오르고 길은 막히고 택시와 경쟁 노선은 점점 느는데다 올 경기 한파는 지독하기만 하다. 이런 상황, 아니 이런 사태(?)에서 극발전소301이 과감하게 버스 시동을 걸었다. 왜? 그들이 보는 건 현실이 아니다. 미래이다.


극발전소301의 창단공연인 만큼 소속 배우들이 15명이나 총출동한다. 소극장 공연치고는 극장이 미어터지도록 끼 있는 배우들이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올해 말까지 혜화동 대학로극장(혜화역 2번출구)으로 가면 늘 <버스가 온다>.*



타임버스


사진출처 - 극발전소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