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 앤 하이드Jekyll & Hyde] 빅토리아 시대의 살인마들
제목 : 지킬앤하이드Jekyll & Hyde(원제 The 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
기간 : 2010년 11월 30일 ~ 2011년 3월 31일
장소 : 샤롯데씨어터
출연 : 지킬&하이드 역 - 조승우, 류정한, 김준현, 홍광호 / 루시 역 - 김선영, 소냐, 선민 /
엠마 역 - 김소현, 조정은 / 댄버스 역 - 김봉환 / 어터슨 역 - 이희정 / 글로솝 역 - 김선동 / 서비지 역 - 강상범 / 주교 역 - 김태문 / 스트라이드, 스파이더 역 - 정현철 / 비콘스필드부인 역 - 홍미옥 / 프룹스 역 - 이용진 / 앙상블 / 염혜정, 조현태, 이경두, 박유덕, 이나영, 손진오, 박종원, 윤민우, 김이삭, 김보경, 정성진, 김수연, 방지숙
주최 : SBS
제작 : ㈜오디뮤지컬컴퍼니, CJ엔터테인먼트㈜, 샤롯데씨어터
주관 : ㈜오디마케팅컴퍼니
그들은 누구인가
“살인자들에 대한 책이 너무 많더라. 보면서 이게 돈이 되는구나, 책뿐만 아니라 신문기사도, 뉴스도, 이런 사건들이 돈이 된다는 것을 알고, 대중들은 이를 마치 엔터테인먼트처럼 여기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충격을 받았다.” 엠뮤지컬컴퍼니 왕용범 연출이 체코 뮤지컬 <살인마 잭>을 한국판으로 준비하는 과정에서 느낀 소회이다. 그는 1888년 런던 윤락가에서 실제로 벌어진 미제 연쇄살인 사건에 당시 언론이 깊게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과 “이 살인자에 대한 책이 미국 대통령 관련 서적보다 더 많다는 사실”에서 “이 악마의 범행에 사람들을 자극하고 끌어들이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을 내린다. 요 사이 연극,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 종과 횡으로 거의 모든 대중문화에서 친숙하게 살인마를 차용하는 세태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과거와 다르지 않다는 반증이다.
연극 '이형사님 수사법' 리뷰(http://blog.daum.net/gruru/155)에서 연쇄살인마를 사이코패스를 규정한 뒤 대중 장르에서 자주 다루는 이유를 ‘실재와 가상에 걸쳐 벌어지는 상황이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 프로이트 식으로 전의식을 짜릿하게 건드리는 단골 메뉴’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다 시 말해 졸음 운전자가 모는 차가 건널목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거나 누군가 발을 잘못 디뎌서 지하철이 들어오는 승장강에서 사람들이 선로 쪽으로 밀리는 상황을 목격하거나 흔한 예로 골목길에서 누군가 나를 노리고 뒤따라온다는 상상이 프로이드의 주장에 따르면 또 다른 억압 기제로 발동해서 무의식 창고에 차곡차곡 쌓인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연쇄살인마의 대명사 격인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가 실은 실제 연쇄살인범과는 관계가 없는 언론의 상상력에 의해 붙여진 별칭이듯이 우리가 무의식 창고에서 근거로 삼고 있는 외상적 경험은 실제로 벌어진 사건이 아닌 왜곡되거나 강요받는 상황이라고 보아야 한다. (회의주의자 사전 중 ‘무의식’ 항목 로버트T.캐롤 저) 이웃이 밤에 으슥한 골목길에서 내 뒤를 따라왔다는 이유로 강도로 덧입히는 과정은 대부분 언론을 통해 주입된 정보를 실체화한 망상이다. 내가 세운 망상이 골목을 강박으로 몰면 뒤에서 따라오는 이웃에게 망상이 아닌 ‘실재’로 받아들이게 된다. 자칫 염려했던 일이 구체화 되면 우리는 다시 언론을 교본처럼 따르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된다.
빅토리아 시대의 살인마들
<지킬앤하이드>(2004, 2005, 2008, 2010), <스위니 토드>(2007), <살인마잭>(2009, 2010) 등 이른바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 3대 연쇄살인마를 다룬 대형 뮤지컬에서 다루는 방식에서 그런 혐의가 짙다. 특히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한국계 영국인 살인마들이 벌이는 살인 행각은 잔인해서 몸서리를 치게 하거나 역으로 기대로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긴장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혐의는 그중 최근작이랄 수 있는 <살인마잭>도 마찬가지이다.
연출 왕용범이 “대중들이 살인을 엔터테인먼트처럼 여기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 분석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늘 예매 전쟁이 벌어지는 <지킬앤하이드>나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흥행하지 못하는 스티븐 손드하임이지만 컬트가 시크한 허리우드 흥행 코드로 치부된 지 오래인 마당에 팀버튼 감독, 조니뎁 주연의 기괴한 고딕풍 뮤지컬 영화로 재탄생한 <스위니 토드>에도 해당한다.
<살인마잭>은 다른 작품과 다르게 사적 영역을 넘어 살인을 상품으로 다루는 런던 타임스 먼로 기자를 중요한 축으로 두면서 공적인 영역으로 이중성에 대한 대중의 탐닉으로 확대하면서 나아간 지점이 분명히 있다. 냉정하게 말하면 원작의 큰 틀을 버리지 않았다는 게 맞지만 말이다. 하지만 회색의 음산한 체코산 원작 뮤지컬을 한국식으로 각색해서 화려하게 바꾸고 스타 마케팅을 벌이면서 한국판 <살인마 잭>은 그가 비판하는 바로 그 지점에 닿아 있다. 주인공 다니엘은 작품성보다 흥행성에 비중을 둘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젊은 로맨티스트에서 맴돌고 만다.
이 작품이 <지킬앤하이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이후 속편 격이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888년 영국 윤락가 화이트채플에서 최소 매춘부 5명 이상 잔인하게 난도질하고 내장을 도려낸 살인 사건은 로버트 스티븐슨이 1886년 중편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이상한 사건>를 간행한 지 2년 만에 벌어진 일이다. 두 작품이 시대적 배경을 공유하기도 하지만 각각 독특한 방식으로 발전한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동유럽 체코 뮤지컬이 지역적으로도 그 중간이고, 기획 시스템이 비슷한 한국식으로 바뀌면서 <살인마잭>은 <지킬앤하이드>에 바짝 다가섰다.
지킬 박사와 다니엘
그래서 한때 아류라는 오명을 듣기도 했지만 재미있는 부분은 한국식 흥행 코드로 엇비슷한 조율하고 보니 작품 사이 그 맥락(context)이 더 도드라지게 보인다는 점이다. 두 작품 모두 스펙터클한 무대를 선호하는 한국 뮤지컬 관객들의 취향에 맞게 공을 들인 무대는 19세기 영국 런던의 으슥한 거리를 훌륭하게 재현한다. 무대 전환 방식 등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무대 연출만큼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젊은 의사 다니엘은 지킬 박사처럼 시대에 앞선 의술을 익힌 인물로 신지식인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지킬 박사의 경우처럼 새로운 사조는 비극으로 치달을 수 있는 부작용이 따르는 양날의 검이다. 신대륙 식민지 독립 이후 역풍으로 불어오는 신사조에 대한 영국의 두려움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생계를 위해 매춘을 하는 폴리는 <지캘앤하이드>에서 엠마가 기득권층에 속했지만 새로운 시대 조류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할 경우 미래의 모습이나 다름이 없다. 폴리의 몰락이 중요한 이유는 장기이식대상자로 잭의 살인 욕구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작위적 설정인 동시에 다니엘의 무의식을 건드리는 죄책감의 근원으로 무의식의 심연에 가라앉힌 잭(하이드)를 다시 불러내는 키를 쥔 인물이기 때문이다. <지킬앤하이드>와 연결지어 재구성하면 지킬(다니엘)은 예절과 격식을 따지는 상류층 결혼식에서 하이드(혹은 잭)로 변해 살인을 하고(혹은 난장판으로 만들고) 자살을 하면서(혹은 미국으로 도피하면서) 엠마에게 치욕을 안긴다. 안정된 가문의 선택이 아닌 상대적으로 낮은 신분과 불확실한 미래를 가진 지킬을 선택한 모험의 실패는 곧 엠마(폴리)에게 씻지 못할 상처로 돌아온다.
하이드와 잭
<지킬앤하이드>에서 엠마는 밋밋하고 수동적인 인물로 다뤄지지만 지킬에게 결혼 계약을 통해 중산층들의 계급상승지향적인 사회 풍토를 강요하지 않는다. 지킬이 하이드로 변했을 때 드러내는 스노비즘(snobbism)에 대한 강렬한 적의에 어느 정도 동조를 하는 인물로 엠마는 분명 신여성이다. 하지만 그녀의 온건적인 태도와 족쇄로 작용하는 명문 가문 출신은 인격분리 실험을 벌이는 급진적인 지킬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약을 상징이 아니라고 한다면, 지킬도 충분히 위선적인 인물이라고 보지만, 그나마 그니까 그 정도였지 그 약을 먹은 지킬 박사 주변 위선덩어리들의 변신을 상상해 보라. 대니 보일 감독의 영국 스릴러 영화 <28일후 28 Days Later, 2002>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이중인격의 발현을 사회적 히스테리로 본다면 봉건주의 잔재가 남은 정체된 영국 사회에 대한 반발이 미필적 고의가 되어 벌어진 엠마(폴리)의 파탄은 부메랑이 되어 죄책감으로 되돌아온다. 다니엘을 영국으로 되돌아온 이유는 지킬 박사처럼 부작용을 해결하지 못한 실험 단계에 그치지 않고 미국에서 전문의로서 검증을 받은 입장 차이에서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7년 만에 상상계가 아닌 실재계에서 만난 폴리가 ‘외상적 사건’으로 죄책감을 불러오고 과거 무의식 가장 깊은 곳에 가라앉힌 잭(하이드)를 다시 불러오는 발로라고 보면 “외부로부터 우리의 심리적 삶에 침입하여 균형을 깨뜨리고, 우리의 경험을 조직하는 상징적 좌표를 교란시키는 어떤 것”으로 파악한 프로이드 초기 접근 방식에 충실한 전개이다.
다니엘에게 옛 애인 몰리는 지킬 박사에게 약을 발명하게 된 동기인 병든 아버지로 치환된다. 장기를 이식하는 시대가 도래했지만 무의식 영역에 새겨진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다는 프로이드 이론에 충실하다. 미국에서 돌아온 다니엘과 새롭게 사랑 빠지는 매춘부 글로리아는 루시와 동일한 인물이다. 배우 소냐가 루시와 글로리아 역을 고루 맡은 데에도 어느 정도 기획사의 의도로 보인다.
The Victorian
<살인마잭>는 <지킬앤하이드>와 맞물리면서 근저에 있는 빅토리아 시대(The Victorian)의 초상을 찾아보는 이색적인 재미를 제공한다. 당시 시대 갈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뮤지컬은 누명을 쓰고 15년 동안 유형 생활을 하는 사이, 부인이 자신을 감옥으로 보낸 판사에 의해 강제로 겁탈당해 음독자살을 당한 현실에 잔혹하게 복수를 하는 벤자민 바커의 이야기 <스위니 토드>이다. 하지만 기득권층과 중류계급인 젠틀맨(Gentleman) 사이 미묘한 갈등을 집어내서 보다 세밀하게 시대를 포착한 뮤지컬로 <지캘앤하이드>를 꼽을 수 있다.
빅토리아 시대는 산업혁명과 자유무역을 통해서 영국의 국력이 가장 강했던 시기이지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아메리카 독립, 프랑스 혁명을 위시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봉건주의 체계가 붕괴되는 사회 격변의 시대였다. 개인주의 물결로 평등과 존엄이 강조되었지만 산업혁명으로 도시화와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중산 계급의 대두, 농민계급의 몰락을 가져왔다. 뮤지컬로도 유명한 찰스 디킨즈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는 당시 사회적 문제를 예리하게 다룬 수작이다. 또한 이 시기는 산업 발전으로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한 시기로, 유물론적 사고가 사회 전반에 확산되면서 자연히 종교와 과학의 갈등을 빚었다.
지킬 박사의 실험을 주교, 장군 등 당시 기득권층인 병원 이사회가 받아들였다면 비극이 벌어질 일도 없고 눈부신 발전을 이뤘을 것이다. (그랬다면 괴기소설이 아닌 공상과학소설로 원작 소설을 분류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을 다루는 문제는 신의 영역으로 다루는 사회에서는 용납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지킬 박사와 사회의 갈등은 신약 제조에 있는 게 아니라 정신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왜 당시 치료법에 수긍을 하거나 사회 상식처럼 정신병원으로 보내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이런 점이 뮤지컬에서 명시되지는 않지만, 아버지는 건강하고 성공한 모습을 담은 초상으로 집안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지킬 박사의 일거수일투족을 끊임없이 바라보면서 무의식을 끊임없이 짓누르고 있다.
이성주의 사회
스티븐슨이 이 소설을 쓸 당시에는 정신병원이 극빈자, 범죄자 등을 감금하는 격리수용소 수준은 아니었고 치료보호소 역할을 어느 정도 담당했지만 미셀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감금의 성격을 약간 변형시킨 곳으로 광인들을 보살피기 위해 사슬로부터 '해방'시키지만 실제로는 소외를 증가시킨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고 속성을 밝힌 바 있다. 그래서 여전히 정신 병원은 광인을 치료한다는 명분으로 그들을 격리 수용해서 이성적이고 정상적인 사회로부터 그들을 배제하는 장치로 역할을 했다.
지킬 박사의 반발은 효심에서 비롯한 반발이라기보다 계급사회였던 당시의 계급상승지향적인 사회풍토에서 광인 핏줄로 낙인이 찍혀 계급상승 기회를 박탈당하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의 표출로 볼 수 있다. 이성과 감성의 분리는 데카르트 이후 지금도 그치지 않는 모든 것들을 타자화한 이성주의의 틀에 맞춰 가둔 정신병원 문제와 사회 갈등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다. 이를 당시 사회로 확장하면 밀어닥치는 과학과 물질문명에 적응하고 대응할 준비를 강요받은 영국 사회의 갈등, 불안, 인간 소외이다.
하지만 지킬이 만든 약은 인간을 이성적 인간과 본능적 동물로 양분하는 약이 아니다. 전제를 하자면 하이드 외에 플라톤에 버금하는 이성적인 인물로 제3의 인격이 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그렇지만 약을 복용하기 전의 지킬 박사를 ‘순수한 이성’으로 볼 수 있는가. 그가 만든 약은 이성의 허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약 그러니까 도수 높은 영국 스카치위스키일 수도 작가 스티븐슨이 치료용으로 사용했다는 마약성분이 든 맥각일 수도 있다.
극 중에서 순수 이성을 위해 만든 약이 내면의 폭력과 본성을 드러내는 상황이 아이러니해 보인다. 하지만 지킬 박사가 교육을 통해 이성이라고 믿었던 사회 구조는 실은 이성의 (순수한 철학적) 정의에 극단적으로 반하는 불합리한 사회이다. 당시 사회가 이성의 표피만을 취했다고 보면 그가 발명한 약이 이성 사회로 가는 치료제인 건 확실하다. 지킬 박사에서 하이드로 옮겨가는 과정은 굳이 신비의 약을 쓰지 않더라도 아래에서 설명하는 19세기 영국 소설의 정의에 빈틈없이 들어맞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산업화된 괴물들을 우리는 19세기 이후의 문학에서 거듭해서 만나게 되는 바이지만,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당한 인간은 동료 인간으로부터 역시 소외당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노동이 그 사회적 목적성을 상실하게 되었고, 더 이상 공통적이며 의미 있는 목표를 향하여 동료들과 함께 자유로이 인간답게 일한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노동의 가치 저하는 공동체의 파괴를 의미한다.”
순수한 욕망
하지만 이성주의 사회는 19세기 영국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다. 끝없는 헤게모니 싸움만 지독하게 벌어졌고, 벌어지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의도하는 바가 그저 B급 호러물로만 차용되는 상황은 과연 맞는가. (그렇다면 요즘 뮤지컬 <지킬앤하이드>에 열광하는 한국을 어떻게 봐야할지 난감해진다.)
뮤지컬은 정교한 CG작업이 가능한 영화에 비해 현실성(reality)이 떨어지지만, 실제 크기로 제작, 구성을 하고 많은 배우들을 높은 수준으로 훈련을 시켜 실재와 같은 지형도를 만드는 대형 뮤지컬에 한해 실재(the real)에 근접하게 다가간다. 곧 관객들에게 욕망의 직설적인 통로로 기능한다는 말이다. 3D영화 이후 기술의 발달이 곧 이 경계를 해체할 수는 있겠지만, 아직 우리는 뮤지컬에서 실재의 재현을 목격한다. 특히 <지킬앤하이드>는 이성의 틀을 해체했을 때 뮤지컬로 표현할 수 있는 극에 다다른 인물을 다루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영원히 괴물을 품고 사는 존재이며, 우리 존재의 핵심에는 잔인할 정도로 낯선 무언가가 있다고 보았다. 우리를 구성하는 재료이지만 우리에게 전혀 무관심한 그것, 쇼펜하우어가 의지라고 일컬은 이것은 우리에게 목적이라는 환상을 부여하지만, 그 자체로는 목적도 감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쇼펜하우어에 깊은 관심을 가진 프로이트는 욕망이라는 개념을 이 괴물성의 비형이상학적 양상으로 제시한다. 욕망은 의미에 무심하고 매우 비인간적인 과정이며, 그것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우리를 조종한다. (테리 이글턴, <반대자의 초상> 305쪽)
인문학자 로쟈의 주장이 흥미로우면서도 섬뜩한 점은 우리를 인간 주체로 만드는 것이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이질적인 부분 혹은 ‘괴물성’이라고 진단했다는 점이다. 이글턴을 인용해서 “프로이트는 우리를 인간 주체로 만드는 것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바로 이 이질적인 부분이라고 여겼다. 그것은 마치 치명적 세균같이 우리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개념이 그렇듯이,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에게 가깝다”는 것이다.
이는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게 하는 근저에 욕망이 있다는 고백이다. 하이드는 이 욕망이 대중장르에서 발현한 캐릭터 가운데 가장 사랑을 받은 변종이다. <지킬앤하이드>가 유독 한국에서 유독 열렬한 사랑을 받는 이유는, 결론을 내리자면, 하이드를 하이드답게 표현하는 배우들의 역량이다. 나는 배우 김준현 버전으로 이 작품을 봤다. 공연 일정이 끝나지 않았지만 주인공을 맡은 다른 세 배우에 비해 그에 대한 평가나 환호가 드문 편이다. 그를 두고 최고의 하이드로 부르기도 하는데, 그가 최고의 하이드일 수 있다면 곧 최고의 지킬이라는 의미이다. 일본의 명문 극단 시키에서 낯선 일본어로 최고의 뮤지컬 배우로 섰다는 이력을 보면 그의 공연을 봐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경우는 다르지만 한국과 일본, 극과 극의 무대를 휘어잡은 배우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