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막이 내린 뒤 엘사의 [메카로 가는 길The Road To Mecca]

구보씨 2010. 8. 6. 15:38


기간 : 2010.08.06(금) ~ 2010.08.22(일)

장소 :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출연 : 예수정(미스 헬렌 역), 원영애(엘사 역), 서인석(마리우스 역)

원작 : 아놀 후가드

연출 : 송선호

주최 : (재)한국공연예술센터, 극단 독립극장, (주)플래너코리아

 

 

만일 어떤 이유로 세상에 태어났냐는 질문에 대해 자기존재의 근원을 고민하지 않는 자라면 그리고 그런 빈 영혼을 가진 자와 대화를 하려한다면 차라리 욕을 해주고 말아라. 이들을 설득한다거나 이들을 빛과 어둠이 하나 된 어떤 세계로 끌어내려는 짓은 그대를 심하게 피곤하게 할 것이다. 그들 자신도 안다.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들 자신이, 그들 자신이 살던 세계가, 그들 자신이 꿈꾸던 그 꿈이라는 것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 것인지를 말이다. 아니 그들을 꿈도 꾸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단지 꿈꾸고 있다고 착각은 좀 했을지도 모른다. - 친구 S의 글


도착

연극 <메카로 가는 길>의 배경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카루 사막처럼 발길이 드문, 1년에 두어 차례씩 글이 올라오다 멈춘 친구의 흔적. 나는 카루 사막을 건너 헬렌 할머니가 살고 있는 뉴 베데스다 마을을 찾는 엘사처럼 가끔 그곳을 찾곤 한다. 어쩌면 난, 친구들과 인연을 끊은 지 오래인 그에 대해 위로를 하면서도 한편으로 위안을 삼는 양가감정을 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때 내가 아는 한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었으며 작가를 꿈꿨던 친구의 글은, 괴로운 고뇌 주변에 저주와 원망이 사막에서 말라죽은 동물의 시체인양 뼈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 뼈대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서 다시 되짚어 가는 길을 알려주는 지표가 돼주었다. 까맣게 잊었다가 다시 읽을 때마다 친구의 고요한 울분이 담긴 글들은 내게도 진통제 혹은 마이신이 되기도 한다.


연극이 시작하면 엘사는 무사히 외로운 노인 헬렌의 집에 막 도착한 참이다. 땀으로 범벅이 된 옷을 편안 옷으로 갈아입고 적신 수건으로 축축해진 겨드랑이를 닦는다. 나는 고작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12시간 사막을 달려 헬렌이 살고 있는 뉴 베데스다까지 가는 엘사를 이해한다. 그 집에는 헬렌이 있고 헬렌이 만든 메카의 상징들이 있다. 그리고 사막을 횡단하는 길 위의 시간이 있다.

  

 

사막

모래먼지가 일어나는 사막을 횡단하는 경험은, 오래전부터 바람 따라 들리는 소문을 의지해서 메카를 찾아 나선 순례자들의 전통적인 여정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다는 무저갱을 닮은 수평의 지옥 사막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속에서 바람에 휘날리는 모래알이 된다. 머릿속을 비우고 난 뒤에 남는 빈 공간을 인지하는 그릇인 살과 뼈와 피마저도 지워 모래 한 알과 동일시 될 때까지 나를 끄집어 내리는 과정이다. 엘사는 애인의 배신에 따른 증오로 낙태를 하고 난 뒤 빈 뱃속을 절망으로 가득 채우고 나선 길이다.

 

연극에서는 당시 배경이 소개되지 않지만, 197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극에 달한 아파르트헤이트로 UN에서 회원 자격을 박탈당한 해이다. 이 같은 현실에서 백인인 엘사는 흑인 아이들을 진보적인 시각으로 가르치는 용감한 인권 교사로 등장한다. 흑인 아이들의 인권을 위해 불합리한 세상과의 맞서길 두려워하지 않는 그녀가, 정작 자신의 아이를 제 분에 못 이겨 복수를 대행한 셈이다. 진보적인 성인 여성으로 자유의지에 따른 정당한 권리를 행사한 경우지만, 문제는 그녀가 죽인 아기, 즉 '타자'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이다. 자신의 아이도 낙인을 찍어 용납 못하고 통제 못 하는 그녀가 흑인이자 제자인 아이들을 위한다고 말하는 데에 과연 어느 정도 진정성이 있다고 봐야 할까.

 

사회적 억압과 개인적 선택은 구분 잣대가 다르므로 다른 층위의 논의로 봐야 한다. 하지만 사회와 개인의 잣대를 가르는 기준이 사회적 통념 따랐다면, 당시 남아공 사회는 한편으로 흑백 차별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결국 옳고 그릇의 잣대를 합리적 이성에 두는 한 덧댄 누더기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연장선상에서 엘사의 인종 차별에 대한 적의, 즉 결코 바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정당성을 확보한 신념 역시 개인에 따라서는 상대적 가치로 바뀔 혐의를 들춘다. 다시 말해 체제의 문제라면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하기 전까지 아프리카너들(남아공 이민자 출신 백인)이 비겁하고 이기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악마로 단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연극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아프리카너인 마리우스 목사는 영국계 백인인 엘사와 출신을 두고 갈등의 한 축을 세운다.) 엘사가 혼란스러운 이유이고 사막을 달려온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순례

남의 옷 같은 이성의 굴레에 혼란스러울수록 낙태에 당황하는 통제 불능인 몸의 변화를 직시할 수밖에 없다. 몸의 언어를 듣기 시작하는 순간, 도피 형태지만 순례가 시작된다. 그리고 모든 변화와 개혁이 그렇듯이 절망 끝에서 메카로 가는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녀 스스로에게 다그치고 사회와 맞서면서 올곧게 세운 교사로서 존재 가치는 억지로 세운 모래탑처럼 스스로 무너지겠으나 특정 시각을 허물지 않으면 메카로 가는 길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물론 헬렌이 세운 메카가 엘사의 메카도 아니고 될 수도 없다. 뉴 베데스다 주민들이 헬렌의 작품을 보고 미친 과부에게 들린 악마를 떠올리듯이, 메카란 눈으로 보고 만져본다고 해서 공유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과거의 진리로 불렸던 것이 고착화되면서 도그마로 변하는 사례를 역사에서 종종 목격한다. 중세 기독교의 폐단을 보듯 글로 남은 경전은 해석에 따라 난도질당하는 글자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나 예수가 글을 남기지 않은 이유를 이 같은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보기도 한다.


그녀가 이성으로 배웠던 관념들은 몸의 공동화(空洞化), 감성의 허기짐을 겪으면서 무너지기 직전, 엘사는 진정한 메카로 다다를 수 있도록 이끄는 매개체를 만난다. 불타는 딸기나무이든 오체투지를 하는 선지자는 아니지만 남편을 잃고 농장에서 쫓겨나 아이를 업고 사막을 걸어서 멀고 먼 크래독까지 걸어가는 흑인 여성 페이션스(patience)를 만난다.


페이션스의 인생은 아마도 백인 주인이 지어줬을 그 이름처럼 고단한 ‘인내’의 길이었을 것이다. 페이션스가 걸어온 길은 상징적으로 객체가 되어버린 남아공 흑인들의 비극일수도 있지만 그녀가 걷는 길을 멈추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인종차별 정책 철폐, 만델라 대통령 당선 등 그녀의 아이를 통해 희망을 향한 순례이다. 


엘사는 길이 갈릴 때까지 페이션스를 태워 동행을 한다. 엘사는 후에 헬렌에게 페이션스의 아이가 자신이 내친 아이처럼 보인다 말을 털어놓는다. 그 순간 아이의 피부색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기는 자신이 앞으로 가르칠 교화 혹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그 오랜 기간 핍박을 견딘 인내의 열매로 바뀐다. 페이션스는 더 이상 불쌍한 흑인이 아니라 엘사를 메카로 이끌기 위한 여정의 동반자이다. (헬렌의 마지막 고백으로 깨닫기 전까지 엘사는 그 사실을 아직 모른다.) 

 

 

논쟁

이제 엘사는 헬렌의 집에 도착했고, 다시 연극의 도입부이다. 엘사는 여행을 하다가 우연히 헬렌의 집 마당 작품들을 발견했을 때의 엘사와 지금의 엘사는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 메카가 어디인지 모르는 엘사는 이전의 구태를 완전히 벗어던진 것도, 충격에 따른 혼란에서 벗어난 것도 아니다. 또한 흑인을 철저한 객체화한 사회에서 이에 대항하기 위한다고 해도 니체의 우려처럼 “괴물과 싸우면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그 범주에서 벗어나기란 쉽지가 않다. 


15년 만에 자신을 이해하는 친구 엘사의 갑작스런 방문이 헬렌은 반갑기만 하지만 엘사는 케이프타운의 일들로 사소한 일에도 날카로운 반응을 보인다. 명목상 엘사의 방문은 진척이 없는 작품 활동에 지친 헬렌을 위로하고, 마리우스 목사로부터 헬렌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루어진다.

   

헬렌의 20년 친구를 자처하고 또 애정으로 바라보지만 헬렌을 오로지 ‘다시 돌아와야 할 어린 양’인 교화 대상으로만 보고 자신의 종교관에서 한 치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마리우스 목사의 등장은 오로지 세 명이 등장하는 연극에 급박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목사의 보수적인 종교관은 엘사의 진보적인 태도와 격렬한 대립으로 번진다.

 

  

신앙

하지만 내내 불안해 보이는 엘사와 달리 마리우스 목사는 결코 품위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의 과격한 설정으로 나서지 않는다. 늙은 과부를 양로원으로 인도하는 일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리우스 목사가 보수적인 작은 시골 백인 마을의 영적 지도자이자 실질적인 통치자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면 이교도적인 조각들로 둘러싸인 헬렌의 집은 딱 마녀의 집이다. 혹여 불이라도 난다면 의도하지 않게 마녀 화형식을 치른 꼴이 되니 목사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다.

 

팸플릿 소개도 그렇고 희곡에는 마리우스 목사가 좀 더 간교한 인물로 그려지는 듯한데, 배우 서인석이 연기하는 마리우스 목사는 도리어 평화롭고 여유로워 보인다. 자칫 마리우스 목사의 굳은 신념(혹은 아집)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아 극 자체가 지루해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하지만 서인석의 마리우스 목사는 전형적인 해석을 하지 않는 대신 실제 수십 년 신앙생활에서 다져진 자신의 신념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통한 여유로움으로 보인다. 몇몇 언론에서 ‘12년 만에 연극 복귀’로 서인석을 주목한 점은 연극을 보고나면 충분히 납득할만하다. “예전 저는 후가드의 작품에서 20대 흑인 역을 맡았어요. 지금은 노인을 하거든요. 이 역은 20대가 하는 것보다 훨씬 리얼리티가 살겠죠. 같은 이치에요.”

  

  

아집

으로 헬렌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마리우스 목사와 엘사의 논쟁은 고깃덩이를 앞에 두고 으르렁거리는 두 마리의 개가 벌이는 진흙탕 싸움이다. 마리우스 목사와 엘사는 상대를 철저하게 객체화시킨다는 점에서 쌍둥이다. 이 둘은 호의를 가지고 헬렌을 대한다고 하지만 정작 헬렌을 자신의 범주 안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타자로 던져둔 채다. 헬렌은 마리우스 목사의 시선에서 보면 치매기가 돌고 자칫 집에 불을 낼지도 모르는 늙은이이며, 동시에 엘사의 시선에는 목사의 꾐에 넘어가기 쉬운 어수룩하고 우유부단한 노인네이다.


이는 마리우스 목사가 신도들을 대하는 태도, 엘사 선생이 흑인 학생들을 대하는 평소 태도의 연장이다. 각각 신의 대리인 혹은 자유사상의 투사쯤으로 여기면서 종교의 이성의 대립처럼 보이지만 단지 우상화의 함정에 빠져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관점은 식민지정책에 따른 남아공의 역사가 그랬듯이 전 세계 모든 원주민 위에 서려는 백인들의 오만함과도 단단히 한축이 연결되어 있다. 그들 스스로가 “종교 전파”라는 이념을 목적으로 알았든, 수단으로 알았든 상관없이 말이다.

 

 

나와 너

이 구도를 깨는 역할은 헬렌의 몫이다. 사랑하지 않는 결혼 이후, 불행하지도 않았지만 뉴 베데스다 백인 가정의 관습에 따라 살았던 객체로의 삶은 남편의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만의 메카를 찾는 여정으로 나설 수 있었다. 이미 ‘나-너’ 관계가 아닌 ‘나-이것’ 관계를 혹독하게 치른 셈이다. 마리우스 목사의 양로원 입소 제안이 다시 예전 생활로의 복귀인 만큼 그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는다. 하지만 힘이 되어준 유일한 친구 엘사에 대한 입장은 다르다. 하지만 마리우스 목사를 비난하고 조롱하면서 헬렌의 우유부단함에 화를 내고 욕을 퍼붓는 엘사는 헬렌이 아는 엘사가 아니다. 헬렌은 엘사를 붙잡고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양 소리를 친다.


“너 도대체 누구야?”

 

‘너 왜 이래?’라는 식의 상황 파악이 아닌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힐난은, 헬렌을 유일하게 이해하고 배려하는 주체로서 먼 길을 달려와 그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엘사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 순간이 엘사가 오만의 오류의 빠져 나올 수 있는 단초이기도 하다. 철학자 마틴 부버의 전언처럼 ‘나-너’의 관계는 ‘너’를 통해 ‘나’를 성립할 수 있는 관계망이다.

 

 

메카

2년 후, 1976년 남아공에서는 소웨토 항쟁이 일어난다. 학교 수업의 절반을 아프리칸스어로 진행해야한다는 정부의 방침에 반발한 흑인 학생들이 보이콧을 행사한 항쟁으로 경찰의 유혈 진압은 전국적 저항으로 이어졌다. (아프리칸스어는 아프리카너들의 언어로 ‘백인 지배의 상징’이다.) 소웨토 항쟁은 아파르트헤이트의 종말의 시작을 의미한 사건으로 소웨토 항쟁 이후 많은 흑인 시민이 인종차별의 현실을 인식하고 투쟁에 눈뜨기 시작했다.


짐작컨대 남아공의 양심이라 불리는 작가 아놀 후가드(Athol Fugard)가 실제 인물인 헬렌 마틴을 무대 위로 이끌었듯이 엘사 역시 당시 소웨토 항쟁을 이끌었던 백인 양심 교사들 중 누군가였을 것이다. 당시 남아공의 메카 즉 희망의 땅은 헬렌이 얘기하듯이 어느 특정한 성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바로 그녀가 살고 있는 이 집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바로 그곳, 아프리카의 변화이고 자유이다.


연극 안으로 들어가면, 마리우스 목사는 새로운 메카를 찾기에 자신은 너무 나이가 많다면서 헬렌의 집을 떠난다. 적어도 헬렌의 메카를 인정한 셈이다. 그리고 엘사는 이제야 낙태 얘기를 꺼낸다. 헬렌을 돕기 위해 온 게 아니라 위로를 받기 위해 왔음을 인정한 동시에 헬렌을 비롯해 타인을 향해 쌓았던 자존심의 벽을 허문다. 그 자존심이 거침없는 낙태로 이어졌던 이력을 떠올리면 그녀 안에 생명을 품을 준비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

중극장 규모의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을 헬렌의 집안으로 꾸민 무대는 아프리카 감수성을 담은 장식품 등 소품이 미비해 심심해 보인다. 이에 반해 마지막 어둑어둑했던 무대를 촛불로 환히 밝히는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다. "암흑을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건 잘못이었어. 촛불을 밝히는 법을, 그리고 그 의미를 나에게 가르쳤듯이, 이제는 촛불을 끄는 법을, 그리고 그 의미를 나 자신에게 가르쳐야만 해." 연극 말미, 헬렌의 대사는 의미하는 바가 많다.


서인석은 이순의 배우에게 걸맞게 “촛불은 타들어 가는 생명을 상징한다. 사람들은 촛불이 꺼져가는 걸 비극으로만 생각하지만 인생에 있어서 촛불을 끄는 법도 알아야 한다. 촛불 끄는 법을 배운다는 건 결국, 죽음을 앞둔 인간이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주변 사람에게 졌던 빚을 갚으면서 마무리 하는 걸 의미”한다고 고 풀이한다.

 

 

촛불을 끄면 캄캄한 어둠만 계속 될 것 같지만 어둠에 익숙해지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가 보려고 했던 것을 치우는 순간, 오래 전부터 늘 그 자리에 있었으나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이 보기 시작한다는 소중한 깨달음과 연결이 된다. 아프리카너로 태어나고 자랐으면서도 스스로 아프리카를 밝히는 횃불로 자처하면서 아프리카를 외면했던 그들의 깊은 반성을 요구하는 말이기도 하다.


78년 <아일랜드>, 80년 <블러드 너트> 이후 30년 만에 세 번째로 아놀 후가드의 작품 출연으로 연기 인생에서 자신만의 메카를 찾고 완성하는 서인석은 물론 연극의 중심을 잡아주는 예수정과 작품에 주최로 참여한 독립극단 대표이기도 한 원영애의 멋진 연기는 무난하게 전개되는 연극의 재미를 한껏 끌어올린다. 98년 공연 때 엘사 역을 맡았던 예수정이 헬렌 역을 맡았다는 후일담 역시 엘사의 한결 부드러워지고 성찰의 옷을 입은 앞날인듯 보기가 좋다. 배우들의 인생이 잘 묻어나는 수작이자, 연출 송선호의 당부처럼 ‘진정한 의미에서 멋진 대중극’이다. 

 

 

내 안의 메카

각자가 다를 수밖에 없는 메카, 메카로 가는 길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그래서 거짓일 수밖에 없다. 사방으로 퍼지는 촛불이 곧 메카로 가는 길이며, 촛불을 끈 이후 촛불의 한계에 따른 시공간의 제약이 풀린 대지 역시 넓은 의미에서 열린 메카이다. 엘사를 현대인의 자화상으로 놓고 무대에 불이 들어오기 전과 꺼진 뒤의 상황을 무리하게 쫓은 이유가 있다. 연극 외적인 해석에 얽매였다면 촛불을 켰을 때가 아닌 껐을 때 세상을 보는 법을 익혀야 한다는 헬렌의 조언이 깊은 의미로 다가왔기 때문일 게다. 연극 밖으로 아예 나와 버리면 친구의 당부가 그렇다, 메카로 가고 있기는커녕 그저 독설이나 내뱉는 친구 정도 외에 이제 아는 바가 없지만 그의 치기인 듯 괴로움인 듯 해묵은 글들은.


도약을 하려면 죽어야 한다. 내 안의 무엇인가는 죽어가고 있다. 문제는 죽어가면서도 '아쉬움'이란 공격을 가한다는 것이다. 마치 이미 오래전에 떠난 사랑의 대상에 대한 감정처럼 말이다. 가짜도 오래오래 보면 진짜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가짜다. - 친구 S의 글 중에서*

 

 

사진 출처 - 뉴시스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