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극

[빨래] 빨면 빨수록 동그래지는 빨래 비누처럼

구보씨 2010. 4. 1. 14:29

제목 : 빨래

부제 : 깨끗해지고 잘 말라 기분 좋은 내일을 걸쳐요

장르 : 뮤지컬

기간 : 2009년 7월 24일 ~ 오픈런

장소 : 학전그린 소극장

출연 : 나영 역 - 최보광, 엄태리 / 솔롱고 역 - 박정표, 정문성 / 주인 할매 역 - 이봉련, 김효숙 / 희정 엄마 역 - 성소원, 이미선 / 구씨 역 - 권형준, 맹상열 / 마이클 역 / 조 훈, 최연동 / 여직원 역 - 강유미, 이세나 / 빵 역 - 이영기, 김태문, 이성욱

기획, 제작 : 명랑씨어터 수박

 

  

다 같이 독해지는 세상

한국 땅 곳곳에는 지난 10여 년 동안 불법이라는 등급을 가슴에 달고 우리와 함께 해온 많은 ‘미누’가 살고 있다. 우리의 경제적 필요에 의해서 긴 세월 동안을 묵묵히 노동하면서 꼬박꼬박 세금을 내온 그들에게 강제추방이 아닌 다른 방식의 공존은 없을까? 다니엘 헤니나 인순이 같은 스타들 말고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수많은 혼혈인, 그리고 우리의 일부로 100년을 말없이 함께 살아온 화교들이 등급 표지를 떼고 우리의 다정한 이웃이 되는 방법은 없을까? 오늘도 난 여러 가지 피부색의 수많은 ‘미누’가 단조로운 우리 사회를 아름다운 무지개 색으로 바꿔주는 진정한 다문화 사회를 꿈꾼다. 

- 웹진 <인권> 2009년 11․12월호 휴먼필 ‘어느 음악인에 대한 추억’ 중에서

 

KBS 외국인 예능경연대회 대상, 문화부장관 감사패 수여,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주최 시민가요제 대상, 이주노동자 밴드 ‘스톱 크랙다운’(stop crack down·단속을 멈춰라) 결성, 이주노동자 방송(MWTV) 진행, 다큐멘터리 감독… 1992년, 한국에 온 지 17년 만인 2009년 10월 15일, 강제출국을 당한 미누(본명 미노드 목탄·39)의 한국 생활기이다. 네팔인 미누는 2003년 인권의 날 기념식에 노무현 前 대통령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는 가수가 아니고 식당,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평범한 노동자였다.

 

'불법' 딱지를 달고도 한국 인권을 바로 잡기 위해 살았던 미누의 강제출국은 법적 근거에 따른 타당성만으로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같은 달 28일에는 이주노동자 출신 동화작가 범 라우티(43)가 '제 2의 미누'가 되어 쫓겨났다. 범 라우티의 동화 <돌깨는 아이들>은 인천문화재단이 뽑은 '2009 인천우수도서'에 선정되기도 했다. 미누 들의 부재는 같은 처지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한국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확실히 각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는 그들에게 혹은 그들의 나라에서 관용과 화해를 요구할 만한 염치를 잃었다. 다 같이 독해지는 수밖에 없다.

 

  

빨래하기 참 거지같은 2010년 봄

올해 4월은 기상 관측을 시작한 지 103년 만에 가장 추운 4월이었다.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더니 노란 개나리꽃 대신 누런 황사가 먼저 찾아온 봄이다. 겨울과 여름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날씨는 5월까지 이어지더니만 낮과 밤으로 반팔 차림과 점퍼 차림이 낯설지 않다. 흠, 빨래하기에 참 더러운 봄이다. 부글부글한 거품에 섞여 하수구로 빠져 나간 찌든 때들은 또 어디로 흘러가 누구의 심란한 무엇이 될 것이다. 흰 와이셔츠를 다려 입고 집을 나서 본들 희망보다는 실망이 소매 끝 때처럼 금세 눌러앉는다. 먹고 살기에도 참 만만치 않은 봄이다. 그래서 스리슬쩍 찌는 여름으로 가는지 모르겠다. 춥거나 덥거나, 역시 독해지는 세상이다. 때가 잘 빠지는 독한 세제일수록 물을 더욱 오염시키는 건 내 알 바 아닌 세상이다.

 

고단한 일상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뮤지컬 <빨래>의 등장인물들은 빨래비누를 닮았다.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세제, 표백제 광고처럼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독하고 매몰차게 살라고 재촉하는 세상에서 비비고 두들겨도 희미하게 얼룩을 남기는 빨래비누처럼 모질지 못한 사람들이다. 몸이 닮도록 산다고는 하는데, 알아주지 않고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기만 하는 세상, 세상은 그들을 모질지 못한 게 아니라 모자라다고 말한다.

 

 

 

극장 밖 현실과 맞닿은 작품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때 제가 살던 동네 주민들의 모습입니다. 늘 싸우고 경찰이 오갔지만 모두 잠든 새벽이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얇은 벽을 타고 들려왔죠.”

 

추민주 작가/연출의 말처럼 뮤지컬 <빨래>의 장점은 그늘진 곳에 사는 소외된 이들의 현실을 국립극장 무대로 옮겼던 2005년 초연 당시, 그들의 용기에 있다. 소외된 이들의 현실이 연극에서는 종종 다루는 소재지만, 뮤지컬에서는 거의 보기 드물었다. 춤과 노래의 뮤지컬과 사실주의 연극의 조합은 머릿속에서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제작에 제약을 받는 소극장 뮤지컬들을 보면 단기간 흥행을 위해 주로 로맨스 코미디에 안주하는 현실이다. 하지만 현실을 덜지 않고 담으면서도 그 무게에 밀리지 않고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빨래>이고 보면 ‘극사실주의 뮤지컬’로 영역 확장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후 뮤지컬 <연탄길> 등 이른바, 착한 뮤지컬이 제작되기는 하지만 여전히 미비한 편이다.)

 

실패한 뮤지컬을 보면 춤을 보여주기에 급급하거나 음악에 끌려 다니기 바빠 구성이 허술한 약점을 종종 드러내기 마련이다. 대형뮤지컬은 막대한 제작비를 투자한 볼거리로 상쇄하기도 하지만 소극장 뮤지컬은 세트, 배우, 음악 등 열악하다보니 약점이 도드라진다. <빨래>는 대형뮤지컬을 답습하기 보다는 소극장의 장점을 살려 사실주의 연극 못지않은 생생한 재현과 치밀한 구성을 선보인다. 뮤지컬은 연극과 다르게 OST를 통해서 호흡을 이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뛰어난 뮤지컬 넘버를 보면 곡 자체의 완성도 못지않게 극 완성도와 상호 호흡에서 시너지 효과를 낸다. 국내 창작 뮤지컬에서 뛰어난 OST를 찾기 힘든 이유도 곡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작품의 완성도와 조율에 문제가 있다. <빨래>의 OST는 몇 가지 난점을 잘 극복한 경우이다. 

 

이런 시너지 효과는 작가 출신 연출가의 역량에 따른 것으로, 무대극이든 영상극이든 기본인 대본의 높은 완성도에서 기인한다. 대신 비교하자면 뮤지컬보다는 연극에 더 가까운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규모가 큰 대형 뮤지컬과는 확실히 다른 변별점으로, 소극장의 장점을 잘 활용한 영리한 사례이다.

 

   

산동네에 무지개가 뜨다

공연장인 학전그린 소극장에서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낙산공원 주변 언덕배기 다닥다닥 붙은 단칸방들이 있다. 이곳을 무대로 옮겨온 듯 달동네 어디쯤이 뮤지컬 <빨래>의 주 무대이다. 코앞에 맞닿은 이웃집, 작은 구멍가게, 오래된 선술집까지 오밀조밀한 세트는 소극장 작은 무대가 작게 보이지 않는다. 부대낄 수밖에 없는 주인공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좁은 무대가 답답할 수도 있지만 중대형 공연장보다는 제격이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도 그렇지만 소소한 이야기로 대형공연장에서 걸지게 표현해도 근사하겠다는 기대도 있다.)

 

그중 한 집을 골라 삐거덕 철문을 열고 들어서면 강원도에서 상경한 고졸의 비정규직 나영, 옷장사를 하는 이혼녀 희정 엄마, 희정 엄마의 애인으로 백수나 없는 구씨, 주인 할매와 그녀의 사지 절단 장애인 딸 둘이가 좁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산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구멍가게 노총각 사장, 외국인 노동자들이 있다. 나이도 처지도 사연도 고향도 심지어 국적도 각각인 사람들이다. 같은 번지에 사는 그들의 공통점이란, 세상의 기준으로 얘기하자면 발톱의 때만도 못한 처지이다. 미누처럼 진즉 빨아서 빼버려야 할 존재들일 게다.

 

무대 배경은 88올림픽을 앞두고 도시 미관을 위해 쫓겨난 재개발 주민들을 다룬 ‘상계동올림픽’의 한 장면이다. 그때와 달라진 풍경이라면 빈 방을 채우는 이들 중에 이주노동자들이 눈에 띈다는 것이다. <빨래>에도 ‘경제 성장의 상징인 88올림픽과 남산타워에 반해’ 한국을 찾은 미누와 마찬가지, 희망을 품고 한국에 온 몽골 청년 솔롱고가 있다. 하지만 한국말로 무지개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솔롱고에게 서울이란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넘어서 꼴등을 짓밟는 무서운 세상이다. 밀린 월급을 달라고 공중전화를 붙잡고 애원하는 솔롱고 위로 비에 주룩주룩 내린다. 빨래도 하기 힘든 먹구름만 가득한 세상이다. 비가 그치고 해가 쨍쨍 뜨는 맑은 날이 올까. 후줄근하게 젖은 무지개(솔롱고)는 다시 뜰 수 있을까.

 

  

가장의 부재 혹은 거세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도란도란 사는 게 행복이라 여기는 70년대 주인 할매, 경제적인 이유를 들어 결혼을 거부하는 대신 홀가분하게 즐기기를 선택하는 90년대 희정 엄마, 여기에 한발 더 나아가 사회의 선입견을 딛고 사랑을 선택해 가정을 꾸리는 신세대 나영에 이르기까지 세대를 걸쳐 다른 애정관을 보인다. 그러나 삼대 걸친 그녀들의 이야기는 대한민국 근현대사 여성 잔혹사 편이다.

 

대립과 갈등과 대결 구도의 무한 경쟁 사회에서 ‘가장’의 부재는 열외 현상을 불러온다. 사회구조적인 면에서 경쟁에서 철저하게 배제된 산동네 자체가 가장이 부재한 동네, 일종의 거세된 게토이다.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거동을 못하는 딸을 홀로 돌보는 주인 할매에게는 큰 아들이 ‘가장’ 역할을 맡아야 한다. 하지만 큰 아들 역시 가난의 대물림을 하듯 별 볼일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엄마와 누이의 고통을 외면하다가 희정 엄마의 방을 대신 차지하는 큰아들 역시 거세당한 인물이긴 마찬가지이다.

 

30대인 희정 엄마가 구씨를 좋아하면서도 결혼하지 않는 이유이자 역으로 결혼의 부담 없이 진솔하게 사귀는 이유는 반백수인 구씨에게 애인 이상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홀아비인 구씨와 결혼할 경우, 구씨 아이들과의 관계는 이후 주인 할매의 답습이라는 걸 잘 안다. 젊은 세대인 나영은 ‘가장’의 부재에서 자유로울까. 강원도 강릉 출신, 고졸, 타지에서 셋방살이를 전전하는 나영의 삶이란 도시 빈민들의 사연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나영은 그녀들과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가장의 부재가 가족의 해체를 불러오는데 반해, 나영은 결혼이 마땅치 않는 환경에서 솔롱고와 가정을 꾸린다. 현재 서울의 가구 형태를 보면 1인 가구가 20.8%로 점차 느는 추세인데, 개인적인 취향 등 여러 이유가 있으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기 힘든 사회 구조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

 

 

빨랫줄에 걸린 무지개

가난한 부부를 응원하는 해피엔딩을 보면서 가슴을 쓸어내리고 다행이구나 싶다. 하지만 비정규직으로 부당한 대우와 설움을 견디는 나영과 불법 체류 신분에서 벗어났으나 한국에서 그의 위치가 크게 다르지 않은 솔롱고 부부의 삶을 낙관하기가 힘들다 보니 ‘깨끗해지고 잘 말라 기분 좋은 내일을 걸쳐요’라는 부제를 좀처럼 동의하기가 힘들다.

 

이런 고민은 아이러니하게도 빨래의 정점으로 든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투영과 촘촘하게 짜낸 얼개에서 기인한다. 한국 여성과 결혼한 솔롱고 들이 획득한 주민등록증이 사실 실업자 수백만 대열에 합류했다는 정도의, 그다지 효력이 없는 카드이고 보면 말이다. 솔롱고는 한국 생활 5년 차로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고, 또 한국 사회의 생리를 절절하게 깨달았지만 새 와이셔츠 같은 백색을 제외하고 피부색에 얼마나 민감한 한국 사회에서, 그나마 한국인과 비슷한 몽골인이지만 그의 위치가 박대당하는 재일동포나 새터민보다 나아보이지 않는다.

 

극중 동네 노총각들이 취해서 늘어놓는 푸념은 한탄인 듯 냉정하게 현실을 반영한다. ‘너희도 돈 벌러 온 게 아닌가. 한국인들도 돈을 떼인다’고 항변한다. 그리고 한국에도 장가를 가지 못하는 총각이 많은데 한국 여자를 꼬시다니! 나영에게도 외국인을 사귄다는 힐난이 이어진다. 빈국에서 여성을 사오듯이 데려와 결혼을 하는 기형적인 한국 사회에서 그럴 능력도 없는 이들의 절규는 다시 돌아갈 곳이 있는 솔롱고보다 더 절절하다. 솔롱고는 이들에게 얻어맞으면서도 참은 이유는 나영이를 보호하려는 의도이기도 하지만 불법 체류 신분이 경찰에게 들키면 안 되기 때문이다. 더 나을 것 없는 처지의 사람들끼리 흙탕물 싸움을 벌이는 세상, 그 속에서 발에 치이고 뒹굴어야만 하는 무지개. 이런 사회라면 현실의 미누처럼 자의로든 타의로든 한국을 떠나야 하는 게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솔롱고 데이’는 불가능한가

기획사 명랑씨어터 수박은 지난 2월 21일 ‘나영이 데이-두 번째 공감이야기’를 진행했다. ‘나영이 데이’는 극중 나영이처럼 서울에서 꿈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는 현실의 20~30대 나영이 들을 초대해서 극중 나영이와 함께 서로 위로고하고 공감하는 행사다. 극중 주인공과 동시대 여성들이 같은 고민을 공유할 수 있다는 건 몇 번에 걸쳐 강조했듯이 작품이 현실에 뿌리를 둔 사실적인 작품이라는 덕목에서 기인한다. 관련 기사나 팸플릿을 보면 나영이 들의 높은 호응과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홍보성 이벤트를 넘어서 사회 참여적인 작품으로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자리이다. 추민주 연출은 다문화 활동을 활발히 펼친 여성문화인을 위한 ‘다문화와 함께하는 2009 올해의 여성문화인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불법 체류자 신분과 관련한 에피소드들이 익히 알려진 수준이지만 사실과 다르지 않고, 솔롱고의 고달픔이 나영이의 그것에 못지않다면 <솔롱고 데이>는 왜 열지 않는 걸까? 기획사 입장에서 불법체류자 신분의 솔롱고 들을 초대하기가 쉽지 않은 테고, 또 그들이 극장을 찾을 여력도 없을 지도 모른다. 현실을 반영한다고 해도 대중적인 작품이고, 타깃 층이 솔롱고 들이 아닌 나영이 들이며, 게다가 기획사 명랑씨어터 수박이 사회단체도 아닌데 <솔롱고 데이>는 아무래도 무리다. 하지만 외적인 난점에 앞서 <솔롱고 데이>가 불가능한 이유는 작품 안에 있다.

 

  

해피엔딩이 독 사과는 되지 말아야

이주노동자들의 시선으로 볼 때 <빨래>의 훈훈한 마무리는 ‘리얼’보다는 ‘판타지’에 가깝다. 정식 한국 체류가 가능한 상황이라, 더욱이 위장 결혼이 아닌 한국 여성과 진짜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해서 이룬 현실이라면 말이다. 현실에서 이런 커플이 없는 건 아니라고 해도 작품이 유지하는 냉정한 시선에 비해 결혼으로 뭉뚱그릴 부분이 아니다.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결말은 불법 체류와 관련한 사회 모순을 비켜가는 결과를 초래한다. 현실에서 미누 들이 극중 행복한 솔롱고가 되기 힘든 상황을 외면하는 면죄부가 될 여지가 있다. 무엇보다 결혼과 동시에 한국 사회로의 안착이 불법 체류자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음에도 착각을 불러온다.

 

현실에서 불법 이주민 신분을 유지하면서 사회적인 저항운동을 한 미누의 역할을 모든 솔롱고 들에게 요구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극중에서 기존 사회의 틀을 답습하는 상황은 안타깝다. 경쟁 사회가 바뀌지 않는 이상, 흰색에만 열광하는 황색 흰둥이들의 편견이 바뀌지 않는 이상, 88만원 세대의 대표격인 나영과 이주노동자 대표격인 솔롱고의 결혼은 시너지가 아닌 멍에를 하나 더 쓴 꼴이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바꾸는 주체는 문제를 겪는 당사자들이 먼저 나설 문제이지 남이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빨래의 해석과 관계없이 ‘다문화와 함께하는 여성문화인상’이라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을 내건 상 수상은 사실 아이러니한 결과를 낳고 만다.) 


1인 다역을 소화하는 작품이긴 하지만, 솔롱고 역을 맡은 배우가 1인 2역 사인회 주빈으로 잠깐 등장하는 장면은 한편으로 통쾌하다. 성공한 인물로 카리스마가 넘치는 캐릭터는 극 전개와 관계없이 솔롱고의 억눌린 심정을 연극적으로 표현했다. 이소룡처럼 다져진 몸매 역시 솔롱고의 후줄근한 차림새 뒤로 숨은(?)의 매력을 한껏 뽐낸다. 

 

하지만 솔롱고의 미래 혹은 가능성을 표현했다고 한들, 현실의 나영이 들이 현실의 솔롱고 들을 선택할 가능성은 낮다. 외국 신부를 데려올 처지가 못 되는 노총각들, 즉 ‘거세된 가장’도 선택 외이긴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그녀들이 사회적으로 볼 때 보다 나은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만혼이 늘고, 1인 가족이 느는 이유는 사회적 빈곤 계층끼리의 결혼이후 냉혹한 현실 때문이지 단순히 회피라고 볼 수는 없다. 그래서 현실의 나영이 들이 꿈꾸는 결혼이란 역으로 이주노동자들이 바라는 지위 상승을 겸한 결혼과 다르지 않지만, 이런 꿈이 망상으로 보기보다는 현실의 높은 벽과 고달픈 현실에서 기인한 자연스러운 심리이다. 그렇다면 나영이는 88만원 세대로 그냥 견뎌야 하는가. 아니면 정말 투쟁이라도 해야 할까?

 

  

세상을 바꾸는 1000번의 빨래

“사상적인 편견은 없습니다. 관심사는 오직 문학, 연극, 여성, 환경이에요. 제 작품에는 진실한 부자와 위선으로 가득 찬 빈자도 얼마든지 등장합니다. (…) 특별히 소외 계층의 사연에만 천착하는 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친해지는 것을 좋아해요. 제가 꿈꾸는 세상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함께 행복한 것이죠.”

 

추민주 연출 스스로가 소외 계층 문제에만 천착하지 않았다고 밝혔고, <쑥부쟁이>, <열혈녀자 빙허각> 등 그녀가 공동 대표로 있는 기획사 명랑씨어터 수박의 작품들이 소외 계층보다는 주로 여성을 중심에 둔 이상 소외 문제에 집중한 해석이 과할 수도 있다. 연극인으로 그녀가 말한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함께 행복한 세상’을 표현하는 어느 지점 이상을 요구하는 게 무리일 수도 있고 말이다.

 

2003년 추민주 연출의 학교 졸업 작품으로 태어난 <빨래>는 오는 6월에 1000회 공연을 앞두고 있다. 1000회에서 멈추지 않는 게, 얼마 전에 일곱 번째 공연 팀을 뽑았다는 기사가 오르기도 했으니 <빨래>는 빨래판이 밋밋해지도록 달릴 계획으로 보인다. 역시 오랫동안 사랑을 받은 작품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개선하고 성장을 하면서 쌓은 노하우는 고스란히 다음 버전을 기대하게 만드는 자산이다. 탄탄한 작품 내부 요인 외에 8년여 동안 극중 설정과 달라지지 않은 외적 요인도 <빨래>가 멈추지 않는 이유이다. 나영이와 솔롱고 말고도 빨래 골목길 사람들 모두가 점점 더 위축 받는 세상이지 않은가.

 

  

골목길 연대를 꿈꿔라

자의적으로 선택한 공간이 아니지만 서로 각자 사정을 숨기는 자체가 불가능한 허술한 셋방 구조는 역설적으로 관심, 간섭을 넘어서 호혜라는 특유의 여성성이 발휘되는 공간이 되어 펼쳐진다. 주인 할매의 장애인 딸을 업고 뛰는 희정 엄마가 그렇고, 나영이를 더 나을 것 없는 자기 방에 데려가 눕히는 주인 할매의 맘이 또 그렇다. 얇은 벽 하나, 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원치 않아도 서로 겹칠 수밖에 없는 삶이란 지긋지긋하다가도 공유가 되고 나누어지는 짐이 된다. 자의적이지는 않지만, 재개발 광풍이 불지 않은 골목길은 물리적 거리를 바짝 당기면서 역으로 멋진 연대를 선보인다.

 

역시 연대의 초점은 세입자와 다를 바 없는 주인 할매에게 있다. 보통 임대인과 임차인이 한 집에 살 경우 거주 공간부터 차이가 뚜렷한 경계를 보이는 반면, 주인 할매 네는 구조상 다른 세입자들과 비슷한 구조로 살림살이도 서로 빤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세입자와 주인 사이 경계가 흐릿해지는 지점이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뉴타운 운운하는 재개발 광풍이 부는 즉시, 주인과 세입자 관계는 일순간에 깨진다. 


즉 어느 한쪽에서 손빨래를 대신할 최신형 세탁기를 들여놓는 순간 발로 밟아 빨아가며 나눈 정은 공치사가 되고 만다. 솔롱고, 나영 커플에게 골목길은 최적의 장소인 동시에 마지노선인지라 아슬아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연대라기보다는 아직 무너지지 않은 연대이기는 하지만 <빨래>가 보여주는 끈끈한 연대는 경쟁사회의 대안으로 꼽는 작은 공동체의 아름다운 사례이다. 경쟁 논리와는 이율배반의 가치이다 보니 실천하기 힘든 가치이기도 하다.

 

  

손을 하나 더 보태면 쉬워지는 빨래

<빨래>의 이력을 보면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작품이 스스로 연대 가치를 자가발전하면서 발전하는 케이스라는 것이다. 2009년, 배우 임창정이 솔롱고로 합류를 했을 때의 일이다. “캐스팅 당시 대학로에서 가장 출연료가 높은 배우”였던 임창정은 공연 투자사 부도로 뮤지컬 제작이 무산될 위기에 놓이자, 자신의 출연료가 “제일 큰 문제”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노개런티 출연을 결정했다.

 

임창정의 노개런티 참여는 다른 배우들과 스태프의 동참으로 이어졌고(상대적으로 열악한 이들의 참여는 고려할 부분이라고 보지만), 뮤지컬 예매 순위 1위에 오르면서 위기를 극복했다. 이들이 공유한 <빨래>의 가치는 놓치지 말아야 할 극중 연대 정신과 다르지 않다. 이는 20대 비정규직 문제와 이주 노동자 문제를 소재가 아닌 주제로 놓으면서도 1000회를 이끌어 올 수 있는 힘이라고 하겠다.

 

임창정은 "이 뮤지컬을 3번 봤다. 보고 나오면서 '하느님 감사합니다' 1초라도 숨을 쉬면서 사람들과 얼굴을 부비면서 살 수 있는 이 공간을 허락해줘서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힘든 시기에 많은 분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작품이었다. 나 같은 사람, 여러분과 같은 사람이 이 작품을 봤으면 좋겠다"는 말로 특별한 애정을 담아 소개했다. (매일 경제 2009-04-15자 / 임창정, 뮤지컬 `빨래`에 노개런티로 출연한 사연)

 

  

그래도 사랑이 힘이라고 한다면

명랑씨어터 수박 사람들이 자칫 구호에 그칠 수도 있는 현실을 명랑하게 풀어낸 힘이란 대단한 것이다. 한 작품을 오랫동안 해왔다는 자체가 작품에 대한 애정이 아니고서는 여간해서 할 수 없는 일인 만큼 어쨌거나 이들이 사랑이 힘이다, 라고 한다면 동의한다. 극장 안 해피엔딩이 극장 밖에서 판타지가 되지 않도록, 극장 안과 밖이 서로 통하는 세상으로 바꾸는 힘은 1000회를 함께한 관객들이 몫이다.

 

빨래를 할수록 비누가 점점 사람 사는 모양새를 따라 동글동글 변하듯이 2010년 봄에 만난 <빨래>는 내 손안에 딱 쥐어지는 빨래비누처럼, 지하철 4호선 혜화역 1번 출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양 옆 길게 늘어선 포스터 속에서 빨랫줄에 걸려 하늘하늘하게 웃고 있는 모습처럼, 어깨 힘이 잔뜩 들어간 나를 하늘하늘 바람에 팔랑이는 깃발처럼 풀어놓는다. 그렇게 우중충한 걸레 같던 기분을 휘날리는 깃발인양 마음으로 따라가기만 해도 기분 좋은 작품이다.

 

<빨래>가 끝나고 나오니, 극장에서 멀지 않은 머지않은 천주교 혜화동성당 앞 쪽으로 솔롱고보다는 마이클을 닮은 사람들의 환한 얼굴이 보인다. 대학로의 문화로 자리 잡은 필리핀 벼룩시장이다. 가끔 커플티를 입은 젊은 연인도 보이고, 만삭인 새댁도 보인다. 물건을 고르는 젊은 청년을 보니 셔츠에 포장대로 접었던 흔적이 고스란히 보인다. 서울이 참 각박하다, 각박하다 하지만 그래도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새 옷을 꺼내 입는다. 날씨가 좋다. 일주일에 한 번 고향 정취를 느끼는 날인데 다행이다 싶다. 이런 날은 빨래를 널기에도 딱 좋은 날이다.*

 

 

사진 출처 - 명랑씨어터 수박(www.mtsoobak.com),  이주노동자영화제(www.mwf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