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爾_2010.02ver] 벽사, 요물을 대적하는 광대 놀음 한 판
제목 : 이 爾
부제 : 10주년 기념공연
기간 : 2010년 2월 26일 ~ 2010년 3월 21일
장소 :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출연 : 연산 역 - 김내하, 전수환 / 공길 역 - 오만석, 김호영 / 장녹수 역 - 진경, 하지혜 / 장생 역 - 이승훈 / 홍내관 역 - 정석용, 조희봉
작․연출 : 김태웅
기획․제작 : (주)오디뮤지컬컴퍼니, 극단 우인
창작극이 기념작으로 오르는 2010년
작년에 부조리극의 대가, 이오네스코 탄생 100주년 기념 연극 페스티발이 열린 데 이어, 올해 리얼리즘 연극을 대표하는 체홉의 탄생 150주년 기념 연극 페스티발이 열린다. 셰익스피어 작품이 그렇듯이 대가의 작품은 페스티발이 아니더라도 한 해 몇 번씩 무대를 통해 볼 수 있다. 허나 페스티발은 한 작가의 작품 맥락을 온전히 짚어볼 수 있는 기회라 주목을 하게 된다. 전 세계의 크고 작은 극장에서 흩날리는 체홉의 벚꽃이 아득하게 보이는 듯 상상을 하면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하지만 연극 역사 100년이 넘은 우리에게 기념할 만한 작품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일제 침탈 시절, 식민지 연극에서 비롯된 부분이 있다. 단순히 연극만을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시대의 비극이긴 하나, 친일파 연극인들로부터 군사 독재 시절에 이르는 근현대사에서 한국 연극이 제대로 된 역할을 담당할 수도 없었고, 담당해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지난 2월 27일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 10주년 기념작 연극 <이>의 간판이 내걸렸다. 비록 이제 10년이긴 하지만 우리에게도 떳떳하게 기념할 만한 창작극이 탄생한 것일까.
‘영화 <왕의 남자> 원작 연극 <이 爾>, 그 탄생의 10주년을 기념하다! 연극 <이 爾>의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김내하, 오만석, 김호영, 조희봉 등 원년 멤버들이 모였다.’ 10주년 연극 <이> 앞에 <왕의 남자>가 어김없이 거론된다. 2005년 123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의 파괴력은 원작인 연극을 다시 이끄는 일등공신이었다. 가정이지만 영화 파급력이 아니었다면 연극 완성도를 떠나서 10주년 기념작이 오를 수 있었을까. 적어도 메이저급 뮤지컬 기획사 오디컴퍼니 제작 참여나 이를 근간으로 삼은 예술의 전당 극장 확보, 스타급 연기자로 성장한 출연진 등 이번 공연과는 양상이 다소 달랐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대가로 연극은 영화를 통해 의도하지 않게 달라붙은 동성애 코드를 비롯한 몇몇 가십 검색어가 덩달아 들러붙었다. 원작자 김태웅이 견해차로 영화 시나리오 작업에서 중도 하차했을 만큼, 연극과 영화는 같은 뿌리를 두었으나 다른 견해를 가진 작품임에도 영화의 폭발력으로 인해 연극을 영화와 동일시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오히려 영화를 기준삼아 연극을 보는 시각이 생겼는데, 연극을 보는 내내 해묵은 영화 장면이 떠오르거나 겹쳤다. 영화는 연극에서 실현하기 힘든 사당패의 줄타기 등 상징적인 장면이 인상적이었지만 연극을 먼저 봤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내내 들었다. 그래서 연극 <이> 10주년 공연이 영화의 영향력을 벗어나려는 노력 혹은 실마리를 보는 자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연극의 영화, 영화의 연극
연극 <이>의 10주년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10년 계보를 보면 2005년 영화 개봉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 딱 반으로 나뉜다. 2000년 한국연극협회 올해의 베스트5 연극상, 신인연기상,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선정 베스트3 수상, 2001 동아 연극상 작품상, 연기상 수상, 서울공연예술제 희곡상 수상 등 작품성을 인정받았다면, 영화 흥행 성공에 힘입어 2006년에는 지방 순회공연 등 당시 공연 전 분야에서 예매순위 1위에 올라 대중성까지 확인했다. 작품성이 영화를 낳고, 다시 영화가 대중적 지지를 이끈 우애(?)가 돋보인 작품이다.
이번 10주년 공연은 앞으로 이 작품을 꾸준하게 무대로 올리겠다는 의지로 볼 수 있다.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10주년이 흥행을 위한 홍보나 혹은 자축에 그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은, 창작 정극으로 꾸준한 사랑을 받은 작품인가, 아울러 세계무대에서 통할만한 작품인가 라는 하는 점에서 연극 <이>가 충분히 그럴 만한 가능성을 엿보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비극적인 성장 과정이나 중종반정으로 폐위되기까지 연산군은 햄릿과 리어왕에 비견될 만큼 파토스가 끓어 넘치는 극적인 캐릭터이다. 또한 연산군을 둘러싼 인물들 역시 작용 반작용에 맥없이 휘둘리는 인물들이 아니라, 각각 초점을 맞추면 작품 재해석이 가능할 만큼 뛰어난 인물 유형을 보여준다.
영화에서도 잘 살려냈지만, 연산, 공길, 장생, 녹수, 홍 내관 등 굵고 강한 캐릭터들은 생략과 은유의 연극과 좋은 궁합을 이룬다. 연극 <이>의 인물들이 워낙 강하다보니 전체적으로 매끄러운 조화보다 자칫 개성에 치우칠 우려가 있지만, 조율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다. 되레 다양한 시점에서 다양한 해석과 형식으로 재조합이 무궁무진하다는 행복한 고민에 이른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그렇지 않아도 영화 흥행에 힘입어 2006년 뮤지컬 제작으로도 이어졌다. 하지만 영화 열기가 사그라지면서 연극 역시 2006년 이후 행보가 뜸했고, 2009년에 다시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10주년을 맞이해 새로운 발판의 계기가 될 가능성이 높은 오디컴퍼니와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뮤지컬 기획사의 연극 진출이 활발한 요즘 추세로 보면, 성공적인 대형 뮤지컬 제작, 기획으로 풍부한 노하우를 갖춘 오디컴퍼니의 참여는 연극 <이>의 장기 공연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첫 걸음이 될 것으로 보인다.
또 많은 논의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뮤지컬로의 본격 전환 및 연극과 뮤지컬의 해외 진출 가능성 또한 실마리를 찾은 셈이다. (2006년 서울예술단의 야심찬 한류 프로젝트로 진행한 뮤지컬 <이>는 영화와 달리 한계에 부딪힌 바 있다.) 어쨌거나 공연을 즐기는 관객 입장에서는 역시 명품 연기자로 인정을 받은 원년 배우들의 무대 복귀 소식이 10주년 기념작을 기대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중 공길 역으로 초연 당시 한국연극협회 신인연기상을 받으면서 각별한 인연을 맺은 오만석은 이번 기념 공연을 공길로 마지막을 삼겠다는 소식을 전했다.
영화 공길 역 이준기로 굳어진 앳된 미소년 이미지 부담스러운 나이인데다, 연극 <이>와 뮤지컬 <헤드윅>으로 굳을 수 있는 중성 이미지를 이어갈 이유가 없다. 공길 역 이어 연산군 역에 이른 배우 박정환처럼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 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언론을 통해 알려진 소식을 보면 오만석의 공길 은퇴 선언 말고는 이렇다 할 만한 10주년 공연의 의미를 찾기 힘들다. 다만 10주년 기념 기자 간담회 인터뷰에서 오만석의 발언을 통해 10주년작 이후 단초를 발견 할 수 있다.
권력의 화신인가, 한 송이 꽃인가
오만석과 김호영은 공길에 대한 각자의 해석을 이야기했다. 초연부터 공길 역으로 분했던 오만석은 공길에 대해 “매우 정치적이며 권력지향적인 인물”이라 정의했고, 김호영은 “난실 속에서 자라고 싶었던 꽃”이라 표현했다. (뉴스컬처 ‘[현장] 연극 이(爾) 연습실’ 기사)
극중 공길은 역사의 격류에 떨어진 물 한 방물이지만, 한편으로 물로 가득 찬 잔인 무대를 2시간 내내 차고 넘치도록 이끄는 한 방울이기도 하다. 연산은 늙어도 어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연산이요, 장생 역시 천민 자식으로 뼛속까지 반골인 장생이라면 공길은 가장 꽃다운 시기, 인생에서 이爾라 불릴 만한 절정의 한때, 공길이다. 여성/남성, 대붕(권력)/광대(민중), 연산/장생 사이 어느 지점에서 휘몰아치는 운명을 이끌고 또 비극을 맞이하는 공길은 해석과 분석에 따라 전혀 다른 인물로 그려질 수 있는 인물이다. 연극 <이>의 키를 쥔 인물은 단연 공길이고, 이제 정치적인 공길은 오만석의 은퇴로 마감하는 셈이다.
“한나라당 입장에선 만평 같은 해석도 가능할 거예요. 신료들의 간언을 무시하고 억압하는 폭군 연산군이 노무현 대통령과 비슷하겠지요. 하지만 열린우리당이나 대통령 지지자들 입장에선 영화가 그 반대로 읽힐 겁니다. 사사건건 신료들의 반대에 부딪친 연산군이 “내가 왕이 맞냐?”고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노 대통령이 “내가 대통령 맞냐?”며 재신임을 물은 것과 비슷하잖아요. 노 대통령은 선왕(성종)의 업을 그대로 짊어진 연산군에 대입될 수 있죠.”
영화 상영 당시 이준익 감독 인터뷰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해석은 여전히 현실에도 적용 가능할까. 사림파를 몰아내려던 무오사화는 집권 이후 지난 정권 인사들을 무리하게 갈아 치우는 정국과 닮았으며, 사림파와 함께 훈구파 내 부중파를 제거하려던 갑자사화는 한나라당 내 친이와 친박의 대립과 맞아 떨어진다. 방송국 인사 단행, 트위터 규제 등 언론 장악 논란에서도 국문 투서 사건을 막으려고 훈민정음 사용을 금했던 연산군의 문화 정책과 겹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을 두고 연극 <이>를 정치적인 작품이라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연극 초연 당시인 2000년 상황이 지금과 전혀 다르기도 하거니와, 2005년 44억이 들어간 상업 영화가 정권 비판을 겨냥했을 리도 없다. 정권에 대한 역사적 비교야 연산이 아니어도 비일비재하다.
새로운 공길, 새로운 전환
"쉼 없이 침범해오는 삶의 고통과 번뇌들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짧은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웃음과 놀이라는 답밖에 안 나온다. (…) 웃는 자가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다. 당신, 웃는 당신이 이 땅의 진전한 왕이다."
작/연출 김태웅은 10주년작을 올리면서 이 같은 소회를 전한다. 언어유희로 광대들이 세상을 풍자한 놀이를 ‘소학지희(笑謔지戱)’라 하여 김태웅이 말하는 광대의 웃음이란 코미디를 보고 터트리는 실소가 아니다. 극중 윤지상의 비리를 고발한 놀이마당처럼 왕을 웃기지 못하거나 이해시키지 못하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한 판 풍자극이라고 한다. 하지만 연극에서 에둘러 하는 말치고는 웃음의 정체가 명확하지 않다. 연극에서는 장생을 반정에 참여하는 민중의 대표쯤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연산의 큰어머니이자 박원종의 누이인 월산군부인을 범하여 자결에 이르자 박원종 주도로 일어난 쿠데타인 중종반정에 실제 민중들의 역할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미지수이다.
실제 역사와 상상의 연극을 따로 봐야 함이 마땅하지만, 연극에서 다루는 전개나 결말은 민중극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시 말해 (극중에서든 현실에서든) 어떻게 해야 웃을 수 있는가,가 명확하지 않다 보니 같은 공길 배역을 두고 두 배우의 해석이 갈리는 것이다. 장생의 죽음 이후 왕을 두고 독직을 내뱉는 공길의 전환 역시 장생에 대한 사랑이나 그리움이 아니라면 오만석이 그리는 정치적 공길의 급작스런 변화를 설명하기 힘들다. 극 전개로 볼 때는 김호영의 공길 해석이 설득력이 높은 편이다.
영화 속 공길의 영향이든 연극의 정치적 해석에 대한 부담이든, 연산과 얽혀 굵직한 담론에서 벗어난 김호영 공길이 김태웅이 말하는 광대의 웃음에 오히려 더 가깝다. 역사적 무게감을 짊어지는 대신 빠르고 가벼운 몸짓으로 훨훨 줄을 타는 유연함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 10주년을 넘어서
극중 광대들은 백성들의 눈과 귀와 입이지만 동시에 궁중 광대로 선발된 최고의 예인들이다. 그들의 놀이판을 두고 정권 교체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쳇바퀴씩 해석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왕권 갈아치우기 정도가 아닌 봉건주의 타파와 같은 근본적 개혁은 세력 다툼을 벌인 양반들의 틀에 박힌 굳은 틀에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할 점은 미시적인 접근이 새로운 작품으로의 전환을 위한 유연함이지, 시대 외면이나 멜로물로의 전략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10주년작을 보는 내내 배경으로 삼은 정치적 사건과 거리를 두고 비켜서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보니 굳이 어거지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려나 연극을 미시적인 시선에서 접근하면, 소학지희보다는 관객들의 웃음 유발에 비중을 둔 듯한 몇몇 대목이 흘겨볼 일이 아니다.
정치적 해석의 틀에서 나온다면 개인적으로 단순한 유형으로 다룬 장녹수에 대한 새로운 접근도 꽤나 재미있지 않을까 싶다. 남성들 틈바구니에서 유일한 여성 캐릭터인 그녀는 누구보다 권력지향적이라는 점에서 남근 지향 캐릭터로 다루고 있지만, 남자와 여자 경계에 있는 공길에게 사랑을 빼앗기고, 남자이길 거부한 홍 내관에게 죽임을 당한다. 생물학적인 여자로도, 사회학적인 여성으로도, 남자이지만 남자가 아니고 남성이 아니지만 남성인 캐릭터에게 배척을 당한 아주 불행한 인물이다. 다른 시각으로 보기 시작하면 극중 주요 인물 누구라도 새로운 인물로 재탄생할 여지가 있다.
요물은 누구인가?
귀신을 물리치는 벽사(辟邪) 의식으로 연극을 열고 닫는 대목에서 연극 <이>는 사실주의 작품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궁중 의례로 벽사는 장례 의식의 일환이어서 폐비 윤씨의 죽음을 기리는 연산 주체의 벽사나 연산의 폐위 그리고 그 죽음 이후 민중 주체의 벽사는 전개와 맞아 떨어지면서도, 전체적으로 이 작품이 하나의 제의임을 알 수 있다.
간단한 소품 외에 너른 마당을 본 따 중앙을 비워둔 무대는 오로지 광대극을 위한 마당인 동시에, 광대들이 벽사의 주체인 방상시와 겹치면서, 제의는 한판 놀이로 재구성되었다. 제의와 놀이의 어우러짐은 본래 속성 상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지만 요물을 달래는 제의가 힘겹고 지루한 반복이 아니라 놀이가 되어 "내 가슴이 벌렁거릴 때만 살아있다고" 느끼는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는 역설적인 의미이기도 하다.
마지막 장면인 벽사에서, 죽은 장생은 여전히 눈이 먼 장님이나 금빛으로 빛나는 4개를 눈을 가진 방상시의 눈으로 연산 혹은 연산을 뒤에서 휘두른 귀신을 내쫓는다. 이는 곧 내 안의 요물, 즉 욕망과의 싸움이다. 종종 연극으로 빗댄 권력 비판도 알고보면 결국 내 안의 욕망이 얼마간 대리 실현된 실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데, 어쩌면 저열한 욕망에 허덕이는 내 실체를 알아가는 과정이 괴로운 시시포스의 형벌만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포자기 하지 말라는 조언이다.
10년을 채운 연극 <이爾>에게 바란다면 내 손이 닿지 않는 몸 어딘가로 광대처럼 뛰어다니면서 자신 혹은 나를 둘러싼 세상과 대결을 재촉하는 방상시로서 이[蛀髮蟲]이자, 새로운 형식과 해석을 시도하기에 멈춤이 없는 작품으로 이異질적인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작품으로 거듭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