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택트contact] 그녀들이 여전히 모험과 도전으로 다가오는 이유
제목 : 뮤지컬 <컨택트> 고양공연
장소 : 고양아람누리 아람극장
일시 : 2010년 1월 22일(금) ~ 1월31일(일)
연출/안무 : 수잔 스트로만(Susan Stroman)
대본 : 존 와이드만(John Weidman)
한국연출/안무 : 토메 코즌(Tome' Cousin)
제작 : (주)오디뮤지컬컴퍼니, CJ엔터테인먼트, 고양문화재단김
주최 : (주)오디뮤지컬컴퍼니
다시 돌아온다
1월 31일(일) 오후 6시, 뮤지컬 컨택트(Contact) 한국 초연 마지막 공연 시작을 알리는 차임벨이 울렸다. 손에 돌돌 말린 포스터와 표지에 검은 바탕에 굵은 노란 글씨로 ‘MUSICAL contact’가 새겨진 팸플릿을 들고 공연장으로 들어섰다. 나중에야 든 생각인데, 포스터에 사인이라도 받을 걸 그랬나 싶었다. 사인회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지만 아예 생각도 못한 까닭은 커튼콜에서 장현성이 말한 마지막 인사 때문이었다. 반년의 준비를 거쳐 한 달 여 공연 기간 내내 세 번째 에피소드 'Contact'의 원 캐스팅 주연이었던 그의 소회를 요약하자면 “다시 돌아온다”고 정말 자신 있게 말한 탓이다.
마지막 공연 커튼콜에는 김주원이 함께 했다. 섹시한 노란드레스 대신 긴 재색 코트를, 아름다운 춤 대신 다리를 절룩였지만 밝은 얼굴이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녀는 지난 16일 공연 때 왼쪽 허벅지 근막 파열로 <컨택트> 남은 일정과 국립발레단 '신데렐라'와 '차이코프스키 출연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불러주신다면 영광입니다. 여건이 맞는다면 당연히 하고 싶어요." 그녀의 인터뷰 기사를 보긴 했으나, 컨택트 공연 일정을 소화하는 와중에도 국립발레단 레퍼토리 ‘신데렐라’에서 요정 역을 맡을 예정이었다. (2010년을 여는 국립 발레단 첫 작품, 처마이요와 프로코피예프의 모던 발레극 <신데렐라>도 꼭 보고 싶었던 공연이다. 계획대로라면 발레리나 VS 뮤지컬 배우 김주원 비교를 쓰지 않았을까.)
세계적인 발레리나로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 김주원의 빡빡한 공연 스케줄에, 12년째 참여한 겨울시즌 발레 레퍼토리 발레극 <호두까기 인형>을 포기하면서도 참여한 첫 뮤지컬 외도(?)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를 입었으니, 내가 발레 관계자나 발레 팬이라도 두 번의 외도를 용납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우선 올해 지방 연장 공연 때 함께 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뇌쇄적인 노란 드레스 대신 채도 낮은 긴 옷으로 자태를 숨긴 그녀를 보고 있으려니 아쉬움이 더욱 밀려왔다. 발레 대신 재즈, 현대무용, 발레, 자이브, 스윙을 추는 노란드레스 김주원을 보고픈 마음이 간절하다. 커튼콜이 노란손수건을 흔들며 배웅하는 마지막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아! 노란 드레스 여인이여
나는 그러니까, 국보급 발레리나 김주원의 부상에 내 허벅지 살이라도 대신 떼다(?) 주고 싶은 남성 팬들 1인인 동시에, 그녀가 부상을 입은 <컨택트> 규탄대회 참가 신청도 망설이지 않을 1인이다. 하지만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보자면 그녀의 부상은 그녀 개인은 물론, 주위에 미필적 고의로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국내 첫 극장과 기획사 공동 제작, 낯선 형식의 뮤지컬 초연이라는 도전에는 스타 김주원이 언론을 주도하면서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 와중이었다. 노란 드레스 여인 김주원에 대한 찬사가 <컨택트>의 열기를 한창 끌어 올리는 와중인 데다, 제작사로 참여한 고양문화재단 고양아름누리극장 무대에 서지 못할 상황에 이르렀다.
김주원의 부상은 노란드레스 여인 역 더블캐스팅 이영진에게 단독 주연의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기술적인 부분이 아닌 김주원이기 때문에 품은 고유의 아우라까지 대신 떠안아야 할 상황이었다. 김주원에게 한번 쏠린 시선은 부상 이후에도 마찬가지여서 부상 소식과 일정 차질 보도가 이어졌다. 기사 가운데 새롭게 떠오른 노란드레스 이영진을 주목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대체 역으로 간략하게 소개했을 뿐이다. 난이도 높은 춤에 따른 부상 위험은 마찬가지에 절대 다쳐선 안 되는 와중에도 김주원의 찬사가 이어진 뒤이다 보니, 이영진은 더욱 완벽한 연기를 선보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다.
노란드레스를 보러 왔다
인터넷 배너에서 우연히 본 작은 이미지 한 장 속 그녀. <컨택트> 메인 포스터로 익숙한 노란드레스의 그녀. 오리지널 공연 배우들이지 싶은데, 모노톤 배경 위 노란 드레스는 안데르센 동화 ‘분홍신’처럼 매혹적이었다. 김주원 캐스팅 소식을 알기 전이었다. 사진 속 여주인공이 누군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오브제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였다.
두 달여 시간이 흘러 마지막 공연을 보러 공연장으로 들어서는 중이다. 공연장 입구에 김주원 부상으로 이영진이 대신 출연한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마지막 공연을 찾을 정도라면 익히 이영진의 노란드레스를 보러 왔지 싶은데, 김주원이 <컨택트>에 미친 영향과 극장과의 관계를 더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고양문화재단 2010년 프로그램을 보니 클래식 공연이 눈에 많이 띈다. <컨택트> 제작 참여도 기존 뮤지컬과 다른 클래식한 형식과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의 참여가 플러스 요인이지 않았을까 싶다.)
검정색 배경과 보색으로 배치한 노란드레스. 포스터의 강렬한 흡입력만으로도 무용수라면 분홍신에 버금가는 유혹일 것이다. 10년 만에 찾아온 국내 초연, 앙코르 공연을 장담할 수 없는 치열한 공연 경쟁, 그리고 생리적 신체의 한계. 75년생으로 발레리나로 적지 않은 나이인 이영진은 마지막 인사에서 “<컨택트> 노란 드레스는 무용수들의 꿈”이라며 자신을 “행운아”라고 표현했다. 그녀에게 정말 행운이 찾아왔다면 오랜 노력과 꾸준한 관리가 빚어낸 행운이다. 마찬가지로 마흔이 넘은 나이지만 안무가에서 10년 만에 무대 위로 돌아온 이란영 씨가 주인공을 맡은 ‘Did you move?’를 보면 제작 여건이 아닌, 신체적 나이를 극복하지 못할 일도 아니지만 말이다.
상투적인 표현이겠으나, 이영진은 도도하면서도 섹시했고, 절제하는 듯 현란했으며, 화려하지만 안정감 있는 춤사위로 무대를 사로잡았다. 분홍신을 신은 순간 멋진 춤을 춘다는 마법처럼, 그녀도 노란드레스를 입고 마법에라도 걸린 걸까. 마지막 공연, 마지막 순간까지 마이클 와일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죽음에서 건져내는 노란 드레스 여인은 내 기대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진짜 마법은 이영진이 노란드레스의 신데렐라가 된 지금부터 시작이다.
새로운 도전과 모험
“제가 아이들이 많아요.” 커튼콜에서 이란영이 마이크를 넘겨받자 객석 한쪽에서 열렬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이란영이 한 말이다. 2회와 3회에 걸쳐 뮤지컬 어워즈 안무상 수상자로 안무가로서 최고의 위치를 인정받은 이란영은 <컨택트>의 또 다른 보석이다. 역시 보석은 시간을 뛰어넘는(?) 가치가 있는 법이다. 난이도 높은 기술을 20대 앙상블 못지않게 소화하면서도 코믹하고 노련한 연기가 돋보였다. 그녀가 무용수로 되돌아가 세계적인 안무가 토메 코즌(Tome' Cousin)을 만나는 순간, 곧바로 대한민국 뮤지컬의 발전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도 기립 박수로 환영할 일이다. 2000년, 토니 어워즈에서 카렌 젬바가 이란영이 맡은 배역으로 뮤지컬 부분 여우주연상을 받은 바 있어서 올해 제4회 뮤지컬 어워즈가 꽤나 흥미진진해졌다.
뮤지컬 배우라고 스스로 소개한 장현성 역시 새로운 도전을 무사히 마쳤다. <컨택트>에서 복잡한 내면 연기가 필요한 유일한 캐릭터, 마이클 와일리를 연기파 배우답게 멋지게 소화하면서도, 단독 원캐스팅으로 마지막 공연까지 끌고 온 저력이랄지 물이 오른 춤 실력이 관우가 적토마를 얻은 격이다. <컨택트>는 각각 서로 다른 에피소드 세 편으로 나뉜 덕에 주연과 조연이 비교적 나뉜 작품이다. 옴니버스 형식이 극 몰입을 낮추는 요인이긴 하지만, 뛰어난 앙상블과 신인 발굴에 단단히 한몫을 했으리라 본다. 전 세계 어디든 각 나라마다 최고의 무용수들이 참여하는 <컨택트>이다 보니 한국 공연도 앙상블의 무게감이 웬만한 주조연급 이상이다. 실력 역시 주연에 못지않게 높은 기량이라 시선이 자꾸 분산되고 만다.
컨택트, 무대극의 절정
‘노래 없는 뮤지컬, 그 실험적 무대, 브로드웨이 논란의 중심에 선 화제작.’ 1999년 <컨택트> 오프브로드웨이 초연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 10년 전 ‘브로드웨이 논란’을 되짚어 따질 필요야 없지 싶다. 토니 어워즈 뮤지컬 부문 수상으로 논란을 깔끔하게 끝냈지만, 그에 앞서 뮤지컬이 오페라의 고전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장르들이 만나는 ‘광장’ 역할을 해온 만큼 세계적 뮤지컬로 공식 인정을 받은 실험작을 이제라도 만났으니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다.
<컨택트>는 18세기 회화(Swing) → 20세기 초 무성 영화(Did you move?) → 20세기 말 TV드라마(Contact) 등 각각 특별한 형식을 차용하면서 시대를 대표하는 영상(회화) 이미지와 음악으로 구현한 시발점으로 특별한 뮤지컬이다. (‘Swing’의 모티브, 프라고나르의 그림 ‘그네’를 보면 그네를 타는 젊은 아가씨의 신발이 날아가는 순간을 잘 포착하고 있다. 벗겨진 신발의 의미 분석을 떠나서 영화 못지않게 역동적인 작품이다.) 컨택트는 세 가지 에피소드에서 각각 그림과 영화와 드라마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장르 간 연계(Contact)를 무대극으로 풀어낸 뛰어나고 똑똑한 작품이다. 그 모두를 아울러서 무대극으로 포용하는 만큼, 브로드웨이에 입성한 첫 해에 2000년 토니 어워즈 뮤지컬 부분 최우수 작품상, 남녀주연상, 안무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한 이력은 당연해 보인다.
컨택트, 막이 내린 뒤
관객 입장에서야 형식이나 의미는 부차적이고, 뮤지컬 <컨택트>가 기존 대형 뮤지컬의 제작 방식을 따르는 만큼, 값어치를 할 작품인지가 가장 궁금한 부분이다. <컨택트>가 뮤지컬계에 새바람을 불러온 1999년 이후 10년, 그 사이 한국에서는 넌버벌 퍼포먼스나 이른바, 댄스컬이 국내 시장을 넘어서 한류 상품으로 톡톡한 역할을 하고 있다.
넌버벌 퍼포먼스가 비보잉, 힙합 등 젊은 층의 소구를 끌어내는 데 성공하면서, 이제 대형뮤지컬과 연극의 틈새 장르에서 독자적인 장르로 자리를 잡았다. 넌버벌 퍼포먼스 대중화는 <컨택트> 흥행의 플러스 요인일까. 젊은 관객들의 눈높이에서는 <컨택트>가 무겁게 보이는 반면, 무용극을 선호하는 팬들에게는 가볍게 보일 수도 있다. 여기에 기존 뮤지컬에 익숙한 관객들까지 더해 <컨택트>와 낯선 만남(Contact)을 가진 이후에 어떤 정서적 반응이 일어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일이다.
적어도 <컨택트> 한국 초연은 장르적 의미를 넘어서 새로운 방식의 뮤지컬을 들여온 기획사, 제작에 참여한 극장, 김주원, 장현성, 이란영 등 출연진의 새로운 시도 등 흥미진진한 도전과 모험의 장이었다. 새로운 도전을 지켜보는 일은, 더욱이 최고의 장인들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라면 항상 즐겁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사진 출처 - 컨택트 홈페이지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