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삼겹살 먹을 만한 이야기] 극발전소301 창단 1주년 기념 삼겹살집 풍경

구보씨 2009. 12. 3. 17:05

제목 : 겨울밤 만나는 옴니버스 연극 <삼겹살 먹을 만한 이야기>

장르 : 연극

기간 : 2009년 12월 3일 ~ 2009년 12월 31일

장소 : 우석 레퍼토리 극장  

출연 : 우리는 하나다-_이성순, 강기목, 하남균(작, 연출 : 황선영)

       맛있는 그라운드_김강현, 김성지(작, 연출 : 김묘진)

       다이나믹 영업3팀’_유안, 백선우, 박복안(작, 연출 : 정범철)

       삼겹살 먹을 만한 이야기_김구경, 이엄지

기획 : 극발전소 301

 

 

타임택시는 어디쯤 달리고 있을까

‘1년도 되지 않았으니 규정을 짓는 자체가 의미가 없지 싶다. 다만 지방 공연에 이어 대학로 연장 공연을 준비 중인 <타임택시>의 좋은 출발이 <정류장>이나 <Here Comes The Sun>의 새로운 고민으로도 계속 이어지길, 같이 안고 가길 바란다. 하여, 창단1주년을 기념하는 올 12월 예정 공연 옴니버스 창작극 <삼겹살 먹을 만한 이야기>라는, 제목만으로는 당최 감이 오지 않는 작품이 어떤 녀석으로 태어날지 벌써부터 기대되는 참이다.’  2009년 5월, <타임택시> 리뷰 ‘손을 들면 반드시 <타임택시>가 선다’ 중에서

 

땀이 배기 시작하는 더워지기 시작한 5월에 타임택시를 보고는 추운 12월에야 다시 만났으니 오랜 만에 만난 셈이다. 모르긴 해도 그 사이 타임택시는 여기저기 부지런하고 왕성하게 달렸을 것이다. 타임택시를 만들고, 몰고, 타고 시대와 장소를 거침없이 넘나들던 극발전소301도 각자 무대 위에서, 노트북 모니터 앞에서 열연과 열작을 했을 것이다. 요 몇 개월 동안 극발전소301의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으로 가득 찼을까. 짐작하자면 “확 때려치워? 모르겠다. 삼겹살에 소주나 한 잔 하자”가 아니었을까. (사전 인터뷰 없는 짐작이다. 어쩌면 그들은 올해 유독 안타까운 죽음이 많았던 현실 앞에서 대한민국 미래가 걱정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결론은 술이지만.)

 

하여 이들이 타임택시를 잡아타고 모인 곳이 대학로 삼겹살집이었으니.

 

 

창단 1주년 기념, 따로 또 같이

공연 타이틀 앞에 ‘09정기공연’이라고 붙였지만, <삼겹살 먹을 만한 이야기>(이하 삼겹살)는 극발전소 301의 1주년 창단 기념이다! (이 역시 사전 인터뷰 없다 보니, 그들 스스로 하지 않은 얘기라 비공식적이다.) 겸손일까, 공연 팸플릿 어디에도 창단 1주년 기념 운운이 안 보인다. 이들의 행보를 익히 봐온 입장에서 보자면 <삼겹살>은 창단공연 <버스가 온다>(08.12)와 옴니버스 공연이라는 형식을 따른다는 점에서 그 동일한 궤적을 비교하는 재미를 더한다. 물론 ‘2008년 창단 공연을 시작으로 매해 12월 정기 공연은 하나의 무대에서 3개~4개의 옴니버스로 공연되며 그 중 1작품을 선정 이듬해 20회 이상의 단독 공연을 진행’하겠다는 그들의 창단 계획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대표인 정범철을 필두로 황선영, 최재성, 김묘진의 4인이 중심이 되어 창작극을 발전시키겠다’는 극단301을 응원하는 이강백 교수의 격려처럼 기획력과 연출력과 극작력을 두루 갖춘 젊은 예술가들이 한 팀으로 활동하다가, 연말에 각자의 개인 역량을 발휘하는 공연이라 색다른 맛을 기대하게 만든다. 같은 삼겹살이라도 양념과 소스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 아닌가. 적어도 고기만큼은 국산 삼겹살, 그러니까 수고가 노고가 더 뒤따르더라도 창작극이다.

 

작년 창단 공연에 비해 한결 여유 있게 극을 끌고 가는 삼겹살은 이제 이들이 전진이 다가 아니라는 점을 알았다는 의미로 보인다. 단순한 비교겠으나, 이전까지 주로 이들이 몸이 되어 달리면서 손님들을 찾아다녔다면(버스가 온다, 타임택시), 이제는 삼겹살집 간판을 내걸어 자리를 잡고 손님들 발길을 이끈다. 정주 본능이 연극인의 덕목은 아니지만, 달리되 방향을 살피기 위해 쉬어야 하고, 그래야 더 오래 달릴 수 있다는 단순하지만 지키기 쉽지 않은 태도가 엿보인다.

 

극발전소301의 특징이자 장점이라면 ‘젊은 감성이 잘 드러나는 재기발랄한 창작극’이다. 작년과 올해 공식 공연 2편을 두고 정의 내리기는 이르다. 또 2편 모두 대표 정범철의 스타일이 한껏 묻어난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팸플릿에는 올 2월 ‘개’를 연보에 포함했지만 서울예술대학 젊은 창작 워크샵으로 진행한 ‘개’는 협연으로 보인다. 극단301의 모태 격인 문화공동체 [여인숙]의 기획 작품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독특한 재기발랄함은 다른 극단과는 또 다른데, 이는 젊은 연출, 작가, 배우, 스텝이어서 가능한 부분이다. 억매이지 않은 앙팡 테리블, 이라고 할까. 그런데 어느새 성숙한 모습을 언뜻언뜻 엿보인단 말이다. 그러니까 징그럽게(?) 컸다.

 

잘 숙성시킨 와인 삼겹살처럼

창단 공연 <버스가 온다>는 버스라는 소재를 큰 틀거리로 삼아 3인3색의 협연을 보여준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도 이전 작품의 배우들이 슬쩍 등장하면서 작품 사이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했지만, 극의 재미를 살짝 더하는 후춧가루 정도랄까, 전체를 하나로 묶을 정도는 아니었다. 각각 연출이 하고 싶은 얘기를 하기에도 바빴다.  <삼겹살>에서는 세 가지 이야기 바깥 구조에서 '포크랜드 대학로 301호' 사장 김구겸과 건물 지하 단란주점 종업원 정미란이 전체적인 이야기를 이끌면서 또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만든다. 이들은 세 이야기마다 등장해서 유기적으로 관여하면서, 비유하자면 삼겹살 기름처럼 불판 위의 김치와 콩나물의 양파로 나뉜 다른 세 작품을 부드럽게 하나의 요리로 감싸 안는다.

 

삼겹살집을 시간차를 두고 찾아온 세 테이블 손님들의 이야기 ‘우리는 하나다’, ‘맛있는 그라운드’, ‘다이나믹 영업3팀’ 등은 관객 입장에서 내 얘기가 아니더라도 흔히 테이블 건너로 봐왔던 익숙한 얘기들이라 몰입이 십고 재미가 있는 반면, 삼겹살집 사장이나 종종 껌을 놓고 가는 그녀의 이야기는 도통 낯설다.  그런데도 정작 그들의 얘기가 태우지 않고 노릇노릇 잘 익힌 삼겹살처럼 관객을 끌어당긴다. 정미란이 우연히 고교시절 친구 백선후를 만나는 설정과 이후 눈물을 쏟는 장면은, 배우의 눈물 연기를 일단 칭찬하면서도, 약간 무리하게 익혀서 탄부분인 게 사실이다.

 

하지만 고소한 고기 굽는 냄새는 나지 않지만, 훈훈한 사람 냄새 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세 편의 저 마다 갈등이 해소가 급작스러울 수 있는데, 정미란을 속 깊은 마음으로 종업원이라기보다 한식구로 사장 김구겸이 맞아주면서 극 내내 상추처럼 바닥에 깔렸던 전체 긴장을 풀어서 완화해준다. 김구겸의 극중 대사처럼 상추를 접시에 까는 이유가 폼이 아닌 소화를 돕기 위한 숨은 배려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옴니버스이면서 극이 따로 놀지 않고, 또 무리한 설정을 두고픈 함정에 빠지지 않고, 한 편으로 잘 묶은 이면에 1년 전과 비교해 크게 성장한 극발전소301의 기획력과 연출력을 높이 살 부분이다. 그렇다면 각각의 이야기는 어떨까. <삼겹살>이 삼겹살과 소주를 매개삼아 하고 싶은 얘기는 과연 그 무엇일까. 알코올중독이 되는 이유는 술에서 깨어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 현실에서 기인한다. 극발전소301도 관객도 다 안다.

 

삼겹살은 역시 고기의 힘

내가 극발전소301을 주목한 이유는 젊은 연극인이 가진 내공을 떠나서 고집스레 창작극을 올리고 있다는 점이다. 창작극이라고 무조건 반길 수만은 없다는 건 동시다발로 주위 공연장에서 올라가는 작품들에서 냉정한 판단이 가능하다.  가끔 공연을 보다보면 책 두세 줄 분량으로 용약되는 창작극을 볼 때가 있다. 그러니까 연극이 세상을 이해하는 유일한 틀인양 관객을 속이거나, 혹은 스스로 마취를 걸어서는 안 되는데, 그런 우를 겪는 과정을 보면, 한편으로 이해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좀처럼 다음 작품을 찾아 나서기가 쉽지 않다.

 

극발전소301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역량 이상을 탐내지 않는다. 키높이 구두나 화장발로 겉치레를 하지 않는다는 점은 막 첫돌을 맞아 과욕하기 쉬운 젊은 극단에게는 큰 미덕이다. 게다가 이들이 내놓는 재미는 분명 개콘류과 다른 연극적인 역량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빠르게 웃음 코드를 잡아채는 전문 개그맨들과 다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들이 가진 기본 뚝심, 그러니까 어디 원산지의 어느 부위를 쓰느냐의 고민이다. 삼겹살로 보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아, 옴니버스 연극

옴니버스 극 삼겹살을 각각 부위별로 놓고 보면 ‘공통의 무대, 30분 내외 공연 등 구조적 한계가 드러난다. 그러나 이를 핑계로 삼지는 않았겠지만 핑계처럼 보이면 문제가 좀 있다. 세 가지 이야기는 삼겹살 집 앞에 객석 의자를 당겨놓은 듯 무대도 소품(소주를 딸 때 실제로 들리는 드르륵 소리! 센스가 돋보인다)도 전개도 배우들의 연기도 딱 삼겹살집이다.

 

아무리 그래도 고기를 극장에서 즉석에서 구울 수는 없는 법이다. 세밀한 관찰은 어떻게 무대에서 미리 요리한 어떤 삼겹살을 내올 것인지가 문제다. 황선영의 ‘우리는 하나다’는 골수 운동권 출신 대기업 사원 곽봉수와 IMF 이후 봉수와 처지가 역전된 6년째 공무원 준비 중인 십년지기 친구 김재민, 자신을 좋아하는 재민이 대신 봉수와 술 취해 하룻밤 맺은 인연을 이어가길 원하는 수희가 등장한다. 서로 뒤바뀐 처지에 티격태격 뼈 있는 말이 오가지만 봉수와 재민은 변치 않는 우정이 있다. 하지만 수희가 그녀를 좋아하는 재민 대신 봉수를 택하면서 친구 사이의 갈등이 깊어진다. 봉수의 취업 제안을 재민이 받아들여 취업을 하면서 화해한다.

 

그런데 그들이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려는 의도일까. 봉수가 운동권에서 ‘변절’ 얘기를 들으면서 대기업 사원이 된 계기나 경유, 재민이 아버지의 사업 실패 이후 “결코 망하지 않는 취직”을 위해 6년을 공무원 시험을 보면서도 결국 비정규직으로 취직한 결과, 또 수희와 봉수와 재민의 관계는 또 어떻게 진행될는지 연극이 끝나고 난 뒤에도 미지수다.  

 

 봉수와 재민 사이 ‘공식적’으로 상하가 나뉘고, 또 봉수가 재민을 이끄는 상황이 된 이상 둘 사이의 친구 사이는, 그들의 아버지 관계처럼 위태롭다. 재민이 회사를 그만두면 이전 상태로 돌아갈 것이니 이래도 저래도 문제다.  친구 사이 해묵은 갈등 외에 극에서 불거진 갈등인 삼각관계는 재민이 공무원이 될 일말의 가능성마저도 버린 상황이고, 그로 인해 봉수와 재민 사이 차이가 확고해진 마당이고 보니, 수희 입장에서는 재민과 연인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아예 없어졌다. 

 

그렇다면 취업하면서 재민의 관심이 바뀌었으니, 수희가 원하는 대로 봉수와 가까워질 수 있을까. 봉수가 수희의 뛰어난 영어 실력을 눈여겨보는 듯 하지만, 이후 봉수의 태도로 보건대 수희의 ‘스펙’이 둘 사이 하룻밤 인연을 이어갈 정도로 보이지는 않는다. 쉽게 말해 봉수 주위에 그 정도는 ‘널렸다’. 이들 세 명의 우정은 봉수의 비정규직 계약 기간 만료될 시점까지 한시적으로 유지되겠지만 이후에 깨지거나 더욱 가식적이 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다’라는 제목은 꽤나 역설적이다. 화기애애한 술자리 이면에 ‘냉정한 현실과 이를 통한 시대 비판’일까. 그렇다면 정말 섬뜩하지만 그런 의도였는지 확실치 않다.

 

 

30대를 답습하는 20대

이런 혐의는 두 번째 이야기인 김묘진의 ‘맛있는 그라운드’에서도 드러난다. 속과 겉이 다른 젊은 남녀가 서로 밀고 당기는 소개팅 상황을 축구에 빗대어 코믹하게 풀어낸 상황극이다. 한결 가볍게 즐기면서 볼 수 있지만 상황은 첫 번째 이야기와 같다. 성지의 예쁜 외모에 끌려 섹스가 목적인 강현이나, 술 실력을 물론이고 남녀 관계에 관한 한 강현보다 월등한 고수인 성지의 모습은 한 마디로 ‘욕망’이다.

 

30대 수희의 하룻밤 선택 기준이 봉수의 ‘경제력’이었다면, 20대 성지의 선택은 자신의 ‘외모’를 무기 삼아 결정권을 쥐었다는 차이뿐이다. 돈이든 외모든 권력 관계로 보는 이상, 남녀 사이 ‘먹고 먹히’는 젠더 전복이 빛을 잃는다. 성지/강현 커플도 연인 사이로 발전하면서 해피엔딩처럼 보인다. 하지만 강현이 성기 확대 수술이든 돈이든 취업이든 성지의 ‘스펙’ 수준을 맞추지 못하는 한, 일방적인 관계는 수희/봉수 커플처럼 위태롭다. 그리고 이를 극복할만한 단서나 전개는 보이지 않는다.  

 

돼지고기를 놓고 벌이는 약육강식의 세계

세 번째 이야기, 정범철의 ‘다이나믹 영업3팀’에 이르면 정규직/임시직, 판매/재고, 결혼/불륜 등 앞선 두 작품에서 드러난 친구, 연인의 숨은 권력 구조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황이다. 영업팀의 존재 가치는 오로지 수익 창출, 적어도 이들이 술에 취해서 애처롭게 외치는 ‘다이나믹 영업3팀’ 구호는 ‘우리는 하나다’보다는 솔직해서 소주맛이 난다.

 

약육강식 자본주의 최전선에 있는 팀장 서미연/대리 박복만/임시직 백선후의 서열은 딱 동물의 세계이다. 처음부터 패를 내놓고 시작해서 전개나 결과가 예상이 되는데도, 등장인물이 ‘극적’으로 살아서 뛰어 다닌다. (<타임택시> 촌스러운 아낙 김나연 역 이성순의 세련된 한수희 변신도 눈부시지만, 타임버스 <버스가 온다> 中 정류장의 간이판매대 할머니 유안의 서미경 팀장으로의 변신은, <삼겹살>을 처음보는 관객들과 또 다른 의미로 놀랍고도 반갑다.) 타임택시에서 눈치챘지만 극중 인물 다루는 솜씨가 발군이다.  

 

그럼에도 앞선 두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왜 그들은 하필 영업3팀이고, 노처녀 팀장은 불륜 중이며, 6개월 임시직인 백선후는 작가의 꿈을 포기한 채로, 김재민처럼 정직을 꿈꾸는가 말이다. 이 작품도 백선후가 임시직을 벗어나 정식 발탁되면서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백선후의 미래가 일에 찌든 서미연 팀장이거나 견디지 못하고 조기 퇴직한 김구겸 사장이라면 역시 그들의 웃음도 섬뜩하게 들린다.

 

 

술에 취하고 싶은 냉혹한 현실

꿈을 포기하고 남들보다 뒤늦게 조직의 최하층으로 들어가고도 웃는 김재민과 백선후의 모습을, 나나 식구의 문제라면 그나마 다행인 상황이 맞다. 현실에서 운동권 시절 봉수는 철모르는 시절 얘기로, 이후 초를 다투는 경쟁을 생각하면 진즉 벗어난 게 다행이다. 30대 수희에게 사랑은 낭만이 아니다. 20대 초반인 성지와 강현은 사랑을 키워갈 수 있을까. 전망이 밝지 않은 게, 성지는 곧 뛰어난 외모로 할 수 있는 게 더 많다는 걸 알아챌 테고, 강현은 아직 급할 게 없으니 성지에게 숙이고 들어가는데 한계를 보일 것이다.

 

뒤담화나 늘어놓으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박복만 대리는 승진을 할지 몰라도 자신이 어느새 자신이 욕한 상사들과 같은 처지, 같은 짓을 하고 있을 것이고, 서미연 팀장은 부장과의 사랑이 아슬아슬해서 스릴이 넘치지만 성공하기 힘들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부장 입장에서 서미연 팀장은 영업력 말고는 나이, 외모는 다른 여직원으로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다. 이걸 모를 리 없으니, 같이 즐기거나, 수익을 내기 위해 아래 직원들을 더 졸라매거나 둘 중 하나다. 

 

삼겹살 사장이 성자처럼 보여서야

그런데 퇴직 후 삼겹살집을 차린 전직 영업팀 직원 김구겸이 본격적으로 가세하면서 이야기가 틀어진다. 삼겹살집이라고 경쟁이 만만치 않지만, 세 번째 이야기에서 비로소 프로필을 드러낸 김구겸은 <삼겹살> 등장인물 중에 유일하게 권력 구조에서 자발적으로 비껴선 캐릭터이다. 김구겸의 수평적 관계 지향은 성을 사고팔아 수직적 권력 구조가 발기한 남근마냥 확실한 상황에 시달리는 단란주점 종업원 정미란을 받아들이는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정미란 입장에서는 단란주점 종업원에서 삼겹살집 종업원으로 3차 술집에서 1,2차 술집으로 계급은 수평 이동했을 뿐이지만, 관계는 수직에서 수평으로 90도 전환, 그녀의 경우는 279도 전환을 했다. 위에서 말했듯 김구겸이 그녀를 식구처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정미란은 유일하게 구원(?) 받은 인물이다.

 

그러다보니 김구겸이 극 전체를 포용하면서 떠안은 짐이 너무 크다. 삼겹살집 손님들의 에피소드는 몸서리쳐지도록 현실인데, 따져보면 김구겸이 딱히 베푸는 게 없는데도, 꽤나 비현실적인 인물처럼 보인다. 경기 불황이 가장 먼저 닥치면 소고기 먹다 삼겹살 먹고, 삼겹살 먹다가 김치찌개 먹게 되는데, 적어도 내가 잠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겪은 사장님들은 민감하면 민감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고, 허구를 다루는 연극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이다. 그런데도 훈훈한 결과를 위해 다소 손쉬운 선택을 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삼겹살인 이유

술 주문이 들어오면 재빨리 갖다 줘야 한다. 손님이 술잔만 멀뚱멀뚱 오래 쳐다보게 있노라면 자칫 술 한 잔이 고민 앞에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를 깨닫게 되고, 그만 마시거나 재민이나 서미연 팀장처럼 구토를 하면서 더 추한 꼴을 보게 된다. 좋은 일로만 술집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유가 천차만별이겠지만 그래봐야 술 한 잔, 삼겹살 한 점이라는 걸 몰라서 술집을 찾는 게 아니다. 지나치게 마시지만 않는다면(사실 취하도록 마셔야), 술은 내 안에 들어와 나를 밖으로 끄집어내준다. 술은 ‘드르륵’ 돌아가는 소주 마개처럼 첫 마음 그대로 변치 않는 친구다.

 

소주에 삼겹살이라, 이 순간만큼 효도르와 밥샘이 양 옆에 앉은 듯 세상 두려울 게 없는 조합이다. <삼겹살>은 그렇게 술 한 잔 위안을 받으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외면하지도 말라고 단단히 전제를 달았다. 그 조합을 얼마나 잘 풀어냈는가는 부차적인 문제인 동시에 앞으로 풀어야 할 고민이다. (뭐, 그게 쉽다면 대통령 출마를 고려하는 게 맞다.)

 

창단 공연 <버스가 온다>과 비교해 한 발 나아간 작품인 것은 확실한데, 이 한 발이 이들이 자란 키만큼이나 꽤나 사이가 넓은 한 발이다. 2010년에도  한계를 넘으려는 고민이 이어질 것이다. 그들이 머리를 쥐어 싸고 “때려 치워! 이런 XX. 술이나 마시자”고 할 때마다 그러니까, 삼겹살이 익고 술잔이 부딪히고 누군가 한쪽에서 토악질을 할 때마다 극발전소301의 불빛이 더욱 반가울 것이다. 버스를 타고, 타임택시를 타고 멀리에서 온 손님들에게 보이는 저 친숙한 삼겹살집 간판만큼.

 

추신 : 2010년 도전장

이들이 내년 1월에 셰익스피어를 넘보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들린다. 극단이라면 당연히 거쳐 가는 수순이다. 허나 누구나 무대에 올릴 수 있어도 아무나 올릴 수 없다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물론 <로미오와 줄리엣은 살해당했다>는 제목만 봐도 뭔가 뼈대만 놓고 극발전소301식으로 죄다 뒤바꿨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이 뭔가 일이 벌어지는, 이를 테면 극단을 대표하는 고정레퍼토리처럼, 태동이 시작될지 모른다는 예감이 든다.* 

 

 

 

사진출처 - 극발전소301